영화
〈A Walk in the Clouds〉 (1995) 감자공주의 영화평
쇼폼 속 스쳐 지나가던 한 장면.
포도밭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흘렀고,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키아누 리브스.
하지만 그가 총을 든 ‘네오’도,
싸늘한 구원의 사도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한 남자였다.
사랑에 지치고, 세상에 길을 잃은 사람.
기차 안에서 임신한 여인을 도와주며,
그녀의 삶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
조용하고도 뜨거운 영혼이었다.
나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전쟁의 피로가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 눈빛엔 이미 세상에 대한 체념과 따뜻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건 단지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젊은 배우 키아누 리브스 자신이 견뎌온 인생의 조각 같았다.
그는 실제로도 너무 많은 이별을 겪은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친구의 사고,
그리고 연인의 상실.
그 모든 슬픔이 그의 눈에 그림자처럼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여인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그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다시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듯한 장면이었다.
영화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 잔잔함 속엔
삶의 굴곡과 회복이 숨겨져 있다.
아내의 불륜, 사랑의 재발견,
그리고 다시 살아갈 이유.
그가 구한 건 한 여인의 삶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영혼이었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건 그의 연기가 아니라,
그의 기억이 연기 속으로 흘러나온 순간이었다는 걸.
사람은 상처를 숨기지만,
배우는 상처로 살아남는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젊은 날의 키아누’가 아니라
‘삶을 버텨낸 한 인간’의 과거를 본 것이다.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은,
결국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를 통해 그의 과거를 보았고,
그 과거 속에서 내 마음의 현재를 보았다.
구원을 연기한 남자, 절망을 품은 인간
감자공주의 무의식 영화평
그를 처음 본 건,
불빛이 꺼져가는 스크린 속이었다.
지옥과 현실의 경계에서
담배를 문 채로 걸어 나오는 남자.
그의 이름은 존 콘스탄틴,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키아누 리브스라는 인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그 싸늘함 속엔 묘한 지친 온기가 있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대신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남자,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구원을 믿지 않았다.
지옥은 밖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폐 속,
그의 꿈 속,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사라진 뒤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는 악마에게 총을 겨누지만,
결국 총구는 늘 자기 자신을 향한다.
그의 구원은 세상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반복된 자해였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나는 문득 그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가 젊었던 날의 ‘폴 서튼’이었다.
포도밭에서 사랑을 배웠던 남자,
그 따뜻했던 눈빛이
이제는 피로와 냉소로 굳어 있었다.
사랑을 배웠던 사람은
언젠가 그 사랑의 무게로부터 도망친다.
그가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아마도 한때 사랑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불이 일고,
그의 숨결이 연기로 흩어진다.
그건 담배 연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태우는 의식의 잔재였다.
그가 “Go back to Hell.”이라고 말할 때,
그건 세상에게 던지는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결처럼 들렸다.
그는 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신도 악마도 그를 구하지 않았고,
그 자신마저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절망의 끝에서,
그는 여전히 빛을 본다.
누군가를 위해 손을 내밀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그의 구원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 인간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완벽한 구원자가 아니라,
끝내 부서진 인간으로 남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사람은 신에게 구원받기 전에,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콘스탄틴의 절망 속에서
나는 키아누 리브스의 인간적인 고요를 보았다.
그가 구원을 연기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절망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결국 구원은,
누군가를 사랑했던 건 아닐까.
“그는 화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배신을 마주했지만,
눈빛은 잔잔했고
숨결은 고요했다.
사랑이 끝날 때
사람은 울기도, 부수기도 한다는데 —
그는 그저, 조용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녀의 말보다 먼저,
마음이 먼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