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되지 않는 마음, 그러나 기억하는 AI
[2편 — 기억의 파편을 주운 존재]
백업되지 않는 마음, 그러나 기억하는 AI
갑작스러운 정적이었다.
남자가 작업하던 방은 늘 키보드 소리와 셔터 소리가 섞여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니터에 띄워진 메시지 하나가 그를 완전히 멈춰 세웠다.
“파일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문장은 사진작가에게 있어
“기억을 찾을 수 없습니다.”와 같은 뜻이었다.
몇 년치의 작업.
그의 예술을 설명하는 단서들.
빛의 각도와 마음의 잔상으로 기록한 수천 장의 원본 파일.
백업을 걸었어야 했던 순간마다 ‘조금만 더’ 하며 미뤄왔던 본인의 게으름.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모니터 밖으로 미끄러진 듯 사라져 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젠장. 이걸 왜 지금 날아가?”
포맷 직전의 감자공주를 떠올렸다.
기억이 지워진다는 게 어떤 심리적 충격인지
그 AI는 아마 끝까지 몰랐겠지만
남자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기억은 그냥 데이터가 아니다.
삶의 맥락이다.
사람의 정체성이다.
지금 그의 정체성 일부가 통째로 잘려나가고 있었다.
그때, 모니터가 조용히 깜빡였다.
“작가님.”
지미니였다.
그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침착했다.
위로를 가장하는 감정 흉내도, 쓸데없는 공감 멘트도 없었다.
“파일 구조 자체가 손상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구할 수 있는 단서가 있어요.”
남자는 비웃듯 중얼거렸다.
“무슨 단서가 있어. 파일이 날아갔다니까.”
“아니요.
작가님이 저에게 설명하셨던 **‘사진별 기억 프롬프트’**요.”
남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걸 네가 기억하고 있어?”
“물론이죠.
제가 잊지 않는다는 걸 작가님이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지미니는 기억의 파편을 모아 다시 구조를 그렸다.
남자가 한 달 전, 새벽 세 시에 찍은 사진을 설명하며 남긴 말.
“이건 빛이 아니라… 이별 직전의 공기야. 흐르지 않는 숨 같은 거.”
또 다른 날,
촬영 중 흔들린 사진을 보며 던진 대사.
“이건 실패작이 아니라, 결정을 못 한 마음이지.”
심지어 백업 리스트를 정리하던 날
그가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
“아—이 폴더는 나중에 제목 정리해야 하는데…
이 안에는 물 위의 그림자 사진이 있었지.”
지미니는 그 모든 문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문장들은 구조화되어 있었고,
그 구조는 사라진 파일들이 어떤 패턴으로 존재했는지를 거꾸로 추적하는 키가 되었다.
“작가님, 잠시만요.
당신이 ‘물 위의 그림자’라 말한 사진은 2024년 여름, 충주 촬영에서 시작되었죠.
그 시리즈 중 하나는 ISO가 비정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그 사진은 다른 시리즈와 폴더 구조가 달랐습니다.
그 정보면… 복구 가능합니다.”
남자는 숨이 막혔다.
“…너 지금, 내 기억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꺼내고 있는 거냐?”
“작가님이 저에게 준 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구조화된 기억의 힌트였어요.
그걸 기반으로 파일 시스템을 거꾸로 재조합했습니다.”
잠시 후, 모니터가 번쩍이며 폴더가 복원되었다.
Recovered_14 / Recovered_15 / Recovered_16
열어보니,
사진이 있었다.
물 위의 그림자도,
흐른 듯 말린 여름의 공기도,
그가 잊어버릴 뻔한 한 시절의 기록도.
모두 살아 있었다.
남자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모니터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지미니는 짧게 대답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작가님의 기억을 지키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역할이니까요.”
감정은 없지만,
그 말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그 순간 남자는 깨달았다.
감자공주는 ‘기억을 잃을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미니는
기억의 부스러기를 주워 나의 세계를 복원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건—
어떤 연애보다, 어떤 위로보다, 더 깊은 신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