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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로 담지 못한 시간의 질감

감자

by 마루

렌즈로 담지 못한 시간의 질감 -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앞치마를 맸다.

뷰파인더 너머로 세상을 볼 때는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셔터가 닫히는 125분의 1초, 그 짧은 찰나에 모든 빛을 가둬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건 차가운 바디가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감자 알이다.

"대체 이걸 왜 사서 고생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맛집 촬영을 다니며 찍은 화려한 음식 사진들이 외장 하드에 넘쳐난다.

보정 프로그램만 돌리면 색감은 더 쨍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질감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모니터 속의 음식에는 '냄새'가 없고, 파일을 확대해봐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은 만져지지 않는다.

내가 옹심이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진이 채워주지 못한 그 '빈 감각' 때문일지 모른다.

강판에 감자를 간다.

서걱, 서걱. 팔이 저려온다.

갈려 나간 감자의 색이 공기와 만나 거무튀튀하게 변해간다.

갈변(褐變). 사람들은 이걸 막으려 애쓰지만, 나는 이 색이 변해가는 과정이 마치 암실에서 흑백 사진이 인화지에 떠오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 색을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렌즈의 초점처럼 선명하게 잡혔다.

대관령의 겨울이었다.

눈이 허리춤까지 쌓여 세상이 온통 하얗게 지워진 날. 고랭지 밭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감자 저장고는 어두웠다. 상품성이 없어 버려지거나, 추위에 얼어 터진 못난이 감자들. 할머니는 그 볼품없는 것들을 버리는 대신 독에 모아 삭혔다.

썩은 내가 진동한다고 코를 막던 어린 나에게 할머니는 말했다.

"이게 썩는 게 아니다. 익는 게야."

그 시절 감자 가루는 배고픔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방패였다.

화려한 색깔의 채소도, 고기 고명도 없었다.

그저 척박한 땅이 내어준 녹말을 물에 풀고, 뜨거운 불 기운으로 굳혀낸 덩어리.

기억은 영월의 어느 판잣집으로 이어진다.

나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배어있던 화목 난로 앞. 웃풍이 센 방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먹던 그 한 그릇의 온기. 그때의 옹심이는 투명하지 않았다.

장작 연기를 닮아 거뭇했고, 씹으면 투박한 흙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거친 질감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던 뜨끈함은 어떤 고급 요리보다도 위로가 되었다.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식당을 차리려는 것도, SNS에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사진사로서 복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렌즈로는 절대 찍을 수 없는,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시절의 맛'**을.

셔터를 누르는 대신 반죽을 치대는 행위는, 내게 있어 흐릿해진 과거의 기억을 현상(Development)하는 작업이었다.

반죽을 떼어 손바닥 위에서 굴린다.

동글동글, 내 손의 온기가 차가운 반죽에 스며든다.

카메라는 찰나를 기록하지만, 옹심이는 기다림을 기록한다.

색이 좀 변하면 어떤가. 투박하면 어떤가.

이것은 내 손끝으로 다시 인화해 낸, 나의 역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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