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와 손, 그리고 웃음
회색 반죽의 미스터리
수진은 스마트폰 화면 속 유튜버 ‘강원도 손맛 할매’의 손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 할머니는 냉동실에서 꽝꽝 언 옹심이 봉지를 꺼내 펄펄 끓는 육수에 투하하고 있었다.
뽀얗고 동그란, 마치 눈사람이 빚어놓은 눈덩이 같은 옹심이 알들이었다.
수진의 시선이 자신의 주방 조리대로 향했다.
그곳엔 방금 그녀가 피땀 흘려 강판에 갈아 만든 결과물이 놓여 있었다.
“...왜 내 건 벌써 시멘트 색이냐고.”
수진의 옹심이 반죽은 공기와 접촉한 지 30분도 채 안 되어 거무튀튀한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걸 그대로 냉동실에 넣었다간, 내일 아침엔 분명 현무암 조각들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녀는 요리 초보가 아니었다.
나름 SNS에 요리 계정을 운영하며 ‘금손’ 소리를 듣는 그녀였지만, 이 감자 옹심이만큼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수차례 시도했지만, 냉동만 했다 하면 색이 변하거나 식감이 푸석해졌다.
“도대체 비결이 뭐야? CG인가?”
참다못한 수진은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선배, 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성은 비록 옹심이 전문점은 아니었지만, 식재료의 원리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선배, 유튜브에서 파는 냉동 옹심이들 있잖아요.
그거 왜 색이 안 변해요? 감자는 갈아놓으면 바로 산화되잖아요.
내 건 완전 잿빛인데.”
수화기 너머로 민성이 웍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거? 나도 식당 하면서 몇 번 봤는데, 몇 가지 가능성이 있지.”
수진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첫째, 방송용 쇼일 수도 있어. ‘냉동’이라고 말만 하고 사실은 그날 바로 반죽해서 찍었을 수도 있지. 조회수가 돈이잖아.”
“에이, 설마요. 냉동실 성에 낀 것까지 다 보였는데.” 수진이 반박했다.
“그럼 둘째, 감자 품종이 다를 수도 있어. 업소용으로 들어오는 것 중에 유독 갈변이 늦게 오는 품종들이 있거든. 네가 마트에서 산 수미감자랑은 아예 종자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지.”
“품종이라… 그건 제가 구할 수가 없잖아요.” 수진이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 이게 좀 중요한데, ‘물기 제거’의 차이야. 넌 집에서 대충 면보로 짰지? 전문점들은 탈수기 수준으로 수분을 쫙 빼고 순도 높은 전분만 가라앉혀서 쓸 거야.
수분이 적고 전분 밀도가 높으면 산화가 훨씬 더디거든.”
수진은 자신의 반죽을 찔러보았다.
아직 축축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 완벽한 하얀색이 설명될까?
“선배, 그거 말고 다른 건요? 뭔가 결정적인 ‘영업 비밀’ 같은 거 없을까요?”
민성이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했다.
치이익, 하고 무언가 볶아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음… 이건 내 추측인데 말이야. 가장 유력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해.”
“그게 뭔데요?”
“살짝 데치는 거야.”
수진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데친다고요? 반죽을요?”
“그래. 채소도 냉동하기 전에 살짝 데치잖아(Blanching). 그래야 효소 활동이 멈춰서 색이랑 영양소가 유지되니까.
감자도 마찬가지야.
갈변을 일으키는 효소를 열로 기절시키는 거지.”
민성의 설명은 이어졌다.
펄펄 끓는 물에 빚은 옹심이를 넣고 겉면만 살짝 익을 정도로 아주 짧게 데친 뒤, 얼음물에 급속 냉각시켜서 냉동하는 방식.
“겉보기엔 생반죽 같지만, 사실은 ‘반숙’ 상태인 거지.
그러면 냉동실에 한 달을 둬도 그 뽀얀 색이 유지될걸?”
전화를 끊은 수진은 홀린 듯 다시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이번엔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비장했다.
강판에 손이 베일뻔한 위기를 넘기며 감자를 갈았다.
민성의 말대로 수분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짜냈다. 하얗게 가라앉은 전분 앙금과 건지를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동글동글하게 빚어진 새하얀 알들이 도마 위에 줄을 섰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수진은 심호흡을 하고 옹심이 알들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하나, 둘, 셋… 딱 30초.
그녀는 재빨리 체로 옹심이를 건져내 미리 준비해둔 얼음물 얼음 목욕을 시켰다.
“어?”
수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나온 옹심이는 표면이 살짝 투명해지면서 마치 코팅이 된 것처럼 반질거렸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생감자의 뽀얀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거다.’
수진은 물기를 제거한 ‘반숙 옹심이’들을 지퍼백에 담아 냉동실 깊숙이 넣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 밤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부스스한 머리로 주방으로 달려간 수진은 냉동실 문을 열었다.
냉기 속에 하얗게 서리가 낀 지퍼백이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지퍼백을 꺼냈다.
그 안에는, 어제 유튜브 화면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눈덩이들이 들어 있었다.
딱딱하게 얼었지만, 시멘트색은 온데간데없고 눈부시게 하얀 자태 그대로였다.
“하…”
수진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었다.
수분 조절이라는 기초 체력 위에, ‘데치기’라는 과학적 원리를 더해 완성한 하나의 작은 성공이었다.
그날 점심, 수진의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옹심이 그릇이 놓였다. 쫄깃하면서도 서걱거리는 완벽한 식감, 그리고 무엇보다 눈으로 먼저 먹는 뽀얀 색감.
https://youtube.com/shorts/jlLLrCLsRRs?si=CxCr7wpT_lqGgM3G
그녀는 숟가락으로 하얀 옹심이 알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할매, 영업 비밀 제가 알아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