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폐가가 된 옛집 마당에 발을 들인 건, 순전히 그 색깔 때문이었다.
잡초가 무성한 회색 시멘트 담벼락 아래, 여름 볕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자지러질 듯 피어난 진분홍색 무더기. 채송화였다.
오후 두 시의 햇빛은 잔인할 정도로 뜨거웠다.
달아오른 땅 위에서 꽃들은 납작 엎드린 채 그 열기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손가락을 대면 델 것처럼 뜨거웠고, 꽃잎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라질 것처럼 얇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꽃밭 앞에 앉았다. “안녕.”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를 만난 건 여덟 살, 유난히 덥던 여름이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을 피해 마당 구석에 숨어 있던 나에게, 담장 너머 옆집에서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는 늘 같은 시간에만 나타났다.
해가 머리 위에서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 두 시쯤이었다.
아이는 유난히 피부가 희고 얇았다. 팔목에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였다.
나는 아이가 늘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마당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발밑의 채송화 꽃밭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왜 거기만 보고 있어?”
내가 물으면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기다리는 거야.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시시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쨍한 햇빛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아이의 투명한 옆얼굴은, 내 유년의 유일한 위로였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나는 내일은 못 올지도 몰라.”
입고 있던 진분홍색 원피스가 그날따라 유난히 붉어 보였다.
“왜? 어디 가?”
“아니. 그냥…
내일은 다른 아이가 올 거야.”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엄마가 나를 불렀다.
다시 담장을 바라봤을 때, 아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붉은 채송화 몇 송이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곧 장마가 시작되었고, 억수 같은 비에 채송화 꽃잎들이 진흙 속에서 뭉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알았다. 아이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내 생애 첫 이별이었다.
“거기서 뭐 하슈?”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허리가 굽은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이 동네 토박이라는 옆집 할머니였다.
“어릴 때 이 담장 너머에 살던 여자아이랑 친했거든요.”
할머니는 잠시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저 집은 자네 가족 이사 오기 전부터 십 년 넘게 빈집이었어.”
“아니에요. 분명 제 또래 여자아이가…
늘 마당에 앉아 있었는데요.”
할머니는 혀를 찼다. “사람은 산 적 없어.
옛날 주인이 심어둔 채송화만 해마다 피고 졌지. 하긴, 자네 어릴 때 보면 맨날 저 담벼락에 붙어서 혼자 중얼거리긴 했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멀어져 갔다.
나는 다시 꽃밭을 내려다보았다.
오후 두 시의 뙤약볕 아래, 채송화는 여전히 붉게 피어 있었다.
‘내일은 다른 아이가 올 거야.’
그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하루가 지나면 시들고, 다음 날이면 또 다른 꽃이 같은 자리에서 피어난다.
어제의 꽃이 사라지면 오늘의 꽃이 그 자리를 채운다.
나는 매일 다른 꽃을 보며, 매일 같은 아이를 만났던 것이다.
외로웠던 유년이 만들어낸 기억. 이름도 얼굴도 갖지 못한, 한 시절의 위로.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꽃밭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해가 기울기를 기다렸다.
뜨거웠던 꽃잎들이 하나둘 몸을 말아 닫을 때까지.
마치,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용히 스스로를 접는 모습을 지켜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