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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향(香)이 덮은 바다

[단편 소설]

by 마루

[단편 소설] 향(香)이 덮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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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프롤로그: 비릿한 공기가 문을 열다

비가 오려나 보다. 코끝에 닿는 공기가 무겁고 비릿하다. 나는 낡은 수첩을 덮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심의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열기는 내 고향, 단양과 영춘의 흙냄새와는 달랐다. 하지만 이 습기 어린 공기는 순식간에 나를 수십 년 전의 그 시간으로 끌고 갔다. 기억은 언제나 머리보다 코가 먼저 반응한다. 내 책상 위에는 이제는 인터넷 검색으로도 찾기 힘든, 어느 블로거의 낡은 기록들이 인쇄되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종이 뭉치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묵은 종이 냄새가 아니라, 화약 냄새였고, 물비린내였으며, 끝내 터뜨리지 못한 울음의 냄새였다.

1장. 조막손이 그려낸 비행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우리 담임 선생님은 '조막손'이라 불렸다. 아이들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해서, 선생님의 오그라든 한쪽 손을 보며 뒤에서 낄낄거리곤 했다. 그 손은 마치 불에 타다 만 나뭇가지처럼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그 비틀린 손이 칠판 위에 닿는 순간, 교실의 공기는 달라졌다. 분필을 쥔 것은 조막손이었지만, 글씨를 쓰는 것은 그의 온몸이었다. 어깨의 근육이 파도치듯 움직이면 칠판 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려한 명필이 새겨졌다. 그것은 글씨라기보다 춤이었고, 침묵의 기도였다.

체육 시간이면 그 경외감은 공포에 가까운 환호로 바뀌었다. "온다!" 네트 너머로 공이 넘어오면 선생님은 성한 손으로 가볍게 공을 띄웠다. 그리고 문제의 그 '조막손'으로 손목을 꺾어 스파이크를 내리꽂았다. 팡―!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듯 공은 운동장 바닥을 강타하고 튀어 올랐다. 비틀린 손끝에서 나오는 그 파괴적인 힘. 선생님은 우리에게 몸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결핍이 반드시 약함은 아니라는 것을. 찌그러진 형태 속에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2장. 산 정상의 거짓말 같은 바다

어느 늦가을,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소금무지산에 올랐다. "이 산 정상에 소금단지를 묻었단다. 불을 막으려고."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 소금을 묻었다는 전설을 들으며 우리는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발아래 세상이 지워져 있었다. 골짜기마다 차오른 구름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첩첩산중 내륙 깊숙한 곳, 바다라곤 본 적 없는 산골 소년의 눈앞에 흰 파도가 넘실거렸다. 산봉우리들은 그 구름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때로 슬픔과 닮아 있었다. 선생님은 그 하얀 바다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기억해라. 우리가 누구였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 아름다운 구름 바다 아래, 땅이 기억하는 끔찍한 냄새가 가려져 있었다는 것을. 선생님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풍경이 아니라, 비극을 덮어준 자연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3장. 끊이지 않는 향 냄새의 정체

마을에는 늘 은은한 향 냄새가 감돌았다. 제삿날이 아닌데도 집집마다 향을 피웠다. 어린 나는 그것이 그저 어른들의 유난스러운 풍습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 향 냄새에는 비릿한 쇠 냄새가 섞여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어느 날, 친구네 집 문틈으로 보았다. 하얀 소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향 연기 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올해도… 이름을 못 불렀구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죽음. 옆에 있던 친구가 무심하게 툭 던졌다. "우리 집도 거기에 있었대. 그 동굴." 그 한마디에 마을을 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향 냄새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썩어가는 기억을 덮기 위한 방부제였고,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비명을 가리기 위한 연막이었다.

4장. 1951년, 하늘이 찢어지던 날

기록은 1951년 1월의 차가운 겨울로 시간을 되돌린다. 그날도 마을은 제사 준비로 분주했다. 갓 지은 밥 냄새와 탕국 끓는 냄새가 평화롭게 퍼지고 있었다. 그 평화를 찢어발긴 것은 '패커드 멀린' 엔진의 굉음이었다. 우우웅― 콰광! 미군의 F-51D 무스탕 전투기가 은색 날개를 번뜩이며 하늘을 가르고 나타났다. 네이팜탄이 떨어졌다. 제사를 지내던 옆집 지붕이 순식간에 불기둥으로 변했다. 절을 올리던 3대가 그 자리에서 재가 되었다. 마을 어귀로는 M4 셔먼 탱크의 궤도 소리가 땅을 울리며 다가왔다. "곡계굴로 뛰어! 굴로 들어가야 산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굴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곳은 피난처가 아니라 무덤이 되었다. 3억 년의 시간을 품은 동굴 안에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민군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민간인 학살. 제사상에 올릴 향불은 마을 전체를 태우는 화염이 되었고, 그날 이후 살아남은 자들은 평생 그 매캐한 연기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마을의 향 냄새는 그날 타버린 살타는 냄새를 지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5장. 시루섬, 울음을 삼킨 어머니

시간은 다시 흘러 1972년 여름, 태풍 '베티'가 단양을 덮쳤다. 남한강이 범람했다. 시루섬은 말 그대로 물 위에 뜬 시루가 되었다. 마을 사람 240여 명은 불어난 물을 피해 지름 5미터 남짓한 물탱크 위로 올라갔다. 그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팔짱을 끼고 거센 물살을 버텼다. 누군가 팔을 풀면 모두가 휩쓸려 내려갈 절체절명의 순간. 그곳에 내 아버지가 있었다. 젊은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타이어 튜브를 엮어 사람들을 구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밤, 가장 위대한 영웅은 따로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지는 물탱크 한가운데. 한 젊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백일 된 아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압사당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저체온증이었을까. 아기는 숨을 멈췄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았다.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지라 비명을 지르고 통곡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내가 울면... 사람들이 동요한다. 흔들리면 다 죽는다.' 어머니는 죽은 아기를 가슴에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차가워진 아기의 체온을 자신의 온기로 덮으며, 그녀는 밤새도록 울음을 삼켰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은 목구멍 안쪽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다음 날 물이 빠지고 나서야, 어머니는 퉁퉁 불어버린 아기를 안고 그제야 짐승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가... 내 아가..." 그 침묵의 밤이, 200명의 생명을 구했다.

에필로그: 살아있는 자의 기록

다시 현실. 창밖의 비 냄새가 짙어진다. 나는 책상 위의 기록들을 손으로 쓸어본다. 역사는 박물관 유리관 속에 있지 않다. 역사는 조막손 선생님의 스파이크 소리에, 소금무지산의 구름 속에, 마을 어귀의 향 냄새 속에, 그리고 시루섬 어머니의 침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글쓴이는 기록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이건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밤에만 쓸 수 있는 기록이다."

나는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이제 내가 기록할 차례다. 렌즈를 통해 그날의 냄새를, 그날의 촉감을 다시 현상해 내야 한다. 잊혀진 감각들이 다시 숨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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