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가 지나간 자리
브런치 소설|화차가 지나간 자리
1. 골목이 먼저 말을 건다
제천 송학.
아시아시멘트 공장의 굴뚝이 시야를 장악하기 전,
먼저 나를 붙잡는 건 골목이다.
벽과 벽 사이,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수 있는 폭.
이불이 걸려 있고, 아이 옷이 바람에 흔들린다.
사람은 없는데 생활은 남아 있다.
소나무와 학의 마을이었을 이곳은
이제 회색 가루 아래 잠겨 있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공기가 한 번씩 가라앉고,
이 마을의 시간은 늘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곳을 영화 촬영지로 기억하지만
사진사인 나는 다르게 걷는다.
나는 장면이 아니라 구도를 밟는다.
이선균이 걸어 들어오던 길은
사건의 무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사라진 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골목을
더듬고 있었을 뿐이다.
2. 초점이 흔들릴 때 진실이 보인다
골목 끝, 낡은 동물병원 앞.
영화 속 그녀가 철창 안의 동물을 바라보던 자리.
그 장면에서 화면은 갑자기 변한다.
톤이 바뀌고, 색이 따뜻해지고,
초점은 눈에만 걸린다.
눈동자가 선명해지는 순간
눈썹은 이미 흐려진다.
심도가 지나치게 얕다.
사진사라면 본능적으로 불편해질 만큼.
처음엔 실수라고 생각했다.
톤은 일관돼야 하고,
초점은 관객을 배려해야 한다.
사진 앨범이라면
가장 중요한 페이지에
인쇄가 어긋난 컷을 끼워 넣은 셈이다.
하지만 송학의 벽에 등을 대고 다시 떠올리자
그 불편함이 설명을 대신했다.
이 여자는
자기 이름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한 사람이다.
어디에도 완전히 선명해질 수 없는 인물.
그래서 화면도
끝내 안정되지 않는다.
3. 카메라는 위를 보지 않는다
방 안.
살해 이후의 장면.
보통의 영화라면
카메라는 위에서 내려다본다.
비극을 정리하고,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아래로 내려간다.
발밑,
미끄러지는 높이.
피는 색이 아니라 질감으로 남아 있고,
바닥은 차갑고,
그 위에서 여자는 웃는다.
나는 그 장면에서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온도를 느꼈다.
이 영화가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4. 셔터를 누르지 않는 선택
다시 송학의 골목.
담벼락 위에 내려앉은 회색 가루를
손가락으로 훑는다.
지워도 남는 것들.
이 마을이 애써 잊고 싶었을
사람들의 흔적처럼.
그래서 감독은
이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거대한 공장이 아니라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생활이 남아 있는 골목을.
빨랫줄 아래에 서서
나는 카메라 캡을 닫는다.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이미 한 번
화차가 지나간 자리다.
여기에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빛은 없다.
사진은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진은 오히려
사라진 것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방식에 가깝다.
빈손으로 골목을 빠져나온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내 신발 밑창 사이사이에
송학의 먼지와
이름을 잃은 누군가의 시간이
조용히 박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