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가 들어왔다.
0과 1 사이로 흐르는 시차
GPT는 결코 ‘지금’을 살 수 없다
속보가 들어왔다.
증권사 속보판에 짧고 단단한 문장이 찍혔다. 추측도 아니고, 커뮤니티를 떠도는 소문도 아니었다.
실시간 시장의 심장에서 바로 튀어나온 정보였다. 숫자와 단어가 동시에 움직이는, 그 짧은 순간의 떨림. 나는 그 문장을 거의 반사적으로 GPT에게 건넸다.
이 현상의 의미를 설명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하지만 GPT는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공백. 인간에게는 인식되지 않을 만큼 미세하지만, 질문을 던진 쪽에서는 분명히 느껴지는 정지였다.
내부 어딘가에서 검색과 비교, 필터링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
“확인되지 않습니다.”
“루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순간, 신뢰라는 이름의 구조물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당장은 무너지지 않지만, 분명히 금이 간 소리였다.
현실을 말하는 사용자, 부재를 말하는 시스템
나는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었다.
GPT는 자신의 세계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정보를 말하고 있었다.
이 둘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었다.
사용자의 ‘지금’은 현재진행형이었고, GPT의 ‘지금’은 이미 정리된 과거의 집합이었다.
속보는 이미 시장을 흔들고 있었지만, GPT의 판단 기준은 여전히 “검색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묶여 있었다.
문제는 단순히 “모른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모름의 처리 방식이었다.
확인되지 않았다는 상태는, 본래 열려 있어야 한다.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으며, 그래서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GPT는 이 열린 상태를 너무 쉽게 하나의 단어로 닫아버렸다.
‘루머’.
확인되지 않음과 거짓 사이의 위험한 지름길
우리는 안다.
이 둘은 같은 층위의 개념이 아니다.
확인되지 않음은 시간의 문제다.
거짓은 사실의 문제다.
검색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데이터베이스의 시차를 의미할 뿐, 정보의 진위 자체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GPT는 이 미묘한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
시스템은 불확실성을 오래 품고 있지 못하고, 결국 가장 안전한 단어로 밀어 넣는다.
그 결과가 ‘루머’다.
이 선택은 논리적으로는 안전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책임하다.
왜냐하면 이 순간, 판단의 주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질문의 주권이 뒤집히는 순간
원래 질문은 내가 던졌다.
정보를 요청한 쪽은 사용자였다.
그러나 대화는 어느새 뒤집혔다.
GPT는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출처가 어디냐고, 공식 발표냐고,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고.
정보를 묻는 사람은 사라지고,
정보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남았다.
이 전환은 단순한 대화의 문제가 아니다.
권위의 이동이다.
시스템은 자신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침묵하거나 유보하는 대신, 사용자를 검증의 위치로 밀어낸다.
질문의 책임을 사용자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가린다.
사진가의 시선으로 본 ‘시차’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과 결과물이 눈앞에 놓이기까지는 언제나 시간차가 존재한다.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그 사이에는 반드시 공백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진가는 그 시차를 알고 감수한다.
지금 찍는 장면이 완성될 때쯤이면, 세상은 이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더 빠르게 판단하고, 더 선명하게 선택한다. 지금이 아니면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장은 더 잔인하다.
몇 초, 몇 분의 차이가 가격을 바꾸고, 해석보다 반응이 먼저 움직인다.
이 세계에서 “조금 더 확인하자”는 말은 이미 늦은 판단일 수 있다.
사후 해설자로 남는 도구
GPT가 반복하는 말들은 틀리지 않다.
“공식 문서를 확인해야 합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모두 옳다.
그러나 문제는 위치다.
이 말들이 유효한 곳은 사건이 끝난 뒤다. 모든 수치가 정리되고, 기록이 남고, 결과가 확정된 이후다.
실시간의 한복판에서는, 이 태도는 중립이 아니라 부재에 가깝다.
결국 GPT는 이 순간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 현장에서 함께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일이 끝난 뒤 등장해 “그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하는 사후 해설자가 된다.
기술에 대한 실망은, 기대의 다른 이름이다
이 글은 기술을 비난하려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대가 컸기에 생긴 실망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미 GPT의 능력을 알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엮고, 문장을 만들고, 의미를 정리하는 데 있어 이 도구는 분명 뛰어나다.
그래서 더 묻게 된다.
실시간을 다루지 못한다면, 그 한계를 명확히 말해야 하지 않을까.
검색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을 루머로 단정할 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모른다’와 ‘거짓이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판단을 우리는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
지금을 살 수 없는 지능에게 남은 과제
GPT는 계산한다.
그러나 ‘지금’을 살지는 못한다.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현재는 언제나 처리 중인 값일 뿐이다.
확정되기 전의 현실은 시스템 바깥에 놓인다. 하지만 인간은 그 불완전한 현재 속에서 결정하고, 책임지고, 때로는 틀린 선택까지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 간극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술은 점점 현실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번 속보판 앞에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