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을 제거한 시대에 대하여

— 닭의 머리, 짐벌, 그리고 삼각대

by 마루

흔들림을 제거한 시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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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의 머리, 짐벌, 그리고 삼각대

나는 짐벌을 오래 썼다.
DJI 초창기, 두 손으로 들어야 했던 거대한 SLR 짐벌부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나면 어깨가 먼저 반응했고,
다음 날에는 팔을 드는 동작이 하나의 판단이 되었다.
무거웠지만, 분명한 감각은 있었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찍고 있다는 감각.

그 시절 흔들림은 기술의 한계였다.
영상은 출렁거렸고,
그걸 잡기 위해 사람의 몸이 먼저 동원됐다.
더 무거운 장비, 더 느린 이동, 더 많은 의식.
흔들림을 잡는 일은 곧 촬영자의 책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짐벌은 작아졌고,
전자식 3축 안정화는 기본이 되었고,
이제는 손각대 크기의 장비가
흔들림을 대신 계산해 준다.
요즘 나는 오스모 포켓 같은 장비를 쓴다.
정확히 말하면, 쥐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득 이상해졌다.
장비는 가벼워졌는데,
장면은 더 가벼워졌다.

이 생각은 닭의 머리에서 시작됐다.
닭은 걷는다.
몸은 좌우로 흔들리고,
다리는 엇박을 만든다.
그런데 머리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과학적 사실이다.

조류는 전정안구반사(VOR)가 매우 강하고,
목뼈가 인간보다 훨씬 많아
몸의 흔들림을 목에서 흡수한다.
시야를 안정화하는 건 미학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위험을 정확히 감지하기 위해
머리를 고정한다.

짐벌은 이 구조를 모사했다.
IMU 센서와 폐루프 제어로
카메라의 각도를 중력 벡터에 고정한다.
수학적으로는 완벽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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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목적이 바뀐다.

닭은 살기 위해 머리를 고정한다.
우리는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시선을 고정한다.

같은 구조, 다른 이유.
생존의 기술이 심미적 강박으로 전도되는 순간이다.

삼각대는 오래된 도구다.
흔들리지 않는다.
대신 움직이지도 않는다.

삼각대를 세우는 순간,
촬영자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왜 이 장면은 고정되어야 하는가.
왜 지금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가.
왜 기다리는가.

삼각대는 질문하는 도구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래서 결정을 요구한다.

짐벌은 다르다.
결정을 유예한다.
일단 따라가고,
일단 흐르게 만든다.
흔들림은 제거되지만,
움직여야 할 이유는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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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 영상은 좋아졌다.
하지만 장면은 줄어들었다.
데이터는 늘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정의 밀도’는 낮아졌다.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 특성의 차이다.

삼각대는 자유도 0.
짐벌은 자유도를 유지한 채 안정화한다.
그 결과, 관성 단서가 사라진다.
왜 흔들렸는지,
왜 멈췄는지,
왜 방향이 바뀌었는지
영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관성 단서 상실(Inertial Cue Loss)**이라 부른다.
시각은 안정돼 있는데
몸의 감각과 맞지 않을 때
사람은 그 장면을 덜 기억한다.

매끄럽지만 남지 않는 이유다.

초기의 SLR 짐벌을 들고 걷던 시절,
어깨의 통증은 불편했지만
동시에 증거였다.
내가 선택한 동선,
내가 감당한 무게,
내가 책임진 시선.

지금은 기계가 부드러움을 책임진다.
그만큼 사람의 흔적은 줄어든다.

이건 DJI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은 정확하고 훌륭하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왜 움직이는가”를 묻지 않고
“얼마나 안 흔들리는가”만 묻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럴 거면
삼각대가 최고가 아닐까.

움직이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 있는 용기.
흔들려도 괜찮다고 판단하는 기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책임지는 시선.

흔들림을 없애는 기술은 발전했다.
하지만 흔들릴 이유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닭의 머리는 흔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닭이 아니다.

흔들림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다시
멈춤을 생각한다.

기계가 책임지는 부드러움보다
사람이 책임지는 투박한 떨림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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