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인연의 조각: 제천 송화사에서의 찰나

송화사

by 마루

붉은 인연의 조각: 제천 송화사에서의 찰나

​제천 송화사로 향하는 길은 온통 백색의 향연이었다. '

하이오렌지필름'의 로고가 새겨진 카메라 가방이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지만,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대설의 풍경은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사찰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처마 끝에 매달린 투명한 고드름이었다. 나는 차가운 공기를 깊게 마시며 대웅전의 문을 열었다. 의뢰받은 사진을 찍기 전, 정성껏 삼배를 올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뷰파인더 너머로 부처님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용돌이치듯 말린 나발과 미간 사이에 박힌 영롱한 백호.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그 형상들이 그날따라 유독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처님이 참으로 잘생기셨지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허리가 조금 굽은 작은 체구의 주지 스님이 서 계셨다. 스님은 나를 찻방으로 이끄셨다. 창을 타고 들어온 겨울 햇살이 실내의 먼지 구름을 뚫고 들어와 스님의 뒷모습을 비추었다.

역광 속에서 세상은 컬러에서 묵직한 **석백탄(흑백화)**의 질감으로 변해갔다. 스님의 얼굴 윤곽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세상 무엇보다 청량했다.

​“저 머리의 돌기는 수행 중인 부처님을 위해 달팽이들이 기어 올라가 햇볕을 막아준 자비의 흔적이라네. 그리고 이마의 백호는 온 세상을 비추는 지혜의 눈이지. 사진사 양반도 카메라 렌즈라는 백호로 세상을 비추고 있지 않은가?”

​스님은 이어 나를 나한전으로 안내하셨다. 그곳엔 붉은색 채색이 된 석고 나한상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스님은 이 나한들이 꿈속에서 ‘몸이 차가우니 따뜻한 옷을 입혀달라’고 청했다는 전설을 들려주셨다. 그 소망을 담아 보살님이 붉게 옷을 입혀드린 후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는, 차가운 석고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나무는 뒤틀리고 돌은 깎아내기만 하지만, 석고는 덧대어 인간의 세밀한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지. 자네가 찍는 사진도 그렇지 않은가? 겉모습이 무엇이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진짜라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 카메라 메모리 카드에는 송화사의 시린 설경뿐만 아니라 스님이 들려준 자비의 이야기들이 ‘카메라’빛 온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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