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우주를 생각한다
우주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언제나 폭발 장면이 아니다.
파편이 튀고, 불꽃이 번지고, 화면이 요동치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 건 다른 순간이다.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우주에서는 폭발이 일어나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대신 헬멧 안에서 들리는 건 숨소리뿐이다.
가빠지는 호흡, 심장의 박동, 장갑 안에서 손가락이 스치는 미세한 마찰음.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우주는 조용한데,
인간은 왜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고 있을까.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라고 배웠다.
공기가 흔들려야 귀가 반응한다.
그런데 우주는 진공이다.
공기가 없다.
그렇다면 소리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느낀다.
무언가를 잡으면 떨림이 전해진다.
금속을 잡으면 차갑다는 감각이 온다.
몸에 전달되는 충격이 있다.
이건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소리처럼 인식한다.
어쩌면 소리는 공기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진동을 해석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각이라는 게 조금 달라 보인다.
우주에는 공기가 없지만 빛은 있다.
빛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통과한다.
빛은 파장을 가진다.
주파수를 가진다.
리듬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빛의 파장도 일종의 진동일까.
물리학적으로 보면 소리와 빛은 다르다.
소리는 매질이 필요하고,
빛은 전자기파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보면,
둘 다 ‘떨림’이다.
결국 인간은
떨림을 감각으로 번역하는 존재가 아닐까.
우주는 비어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암흑물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다.
만질 수 없다.
직접 관측되지 않는다.
그런데 없으면 설명이 안 된다.
마치 유령 같다.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이상하게도 이 구조는 인간의 생각과 닮아 있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무게도 없다.
형태도 없다.
그런데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종종 인간의 머리를 하나의 우주라고 느낀다.
수많은 신경세포가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서 번쩍이는 신호들이 오간다.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나는 태양계를 상상하고,
은하를 상상하고,
우주의 끝을 상상한다.
작은 우주가
큰 우주를 떠올린다.
이게 가능한 건 오직 상상 덕분이다.
빛의 속도는 초당 30만 킬로미터라고 한다.
그런데 생각은 어떨까.
나는 지금 눈을 감고
지구를 떠올리고,
화성을 떠올리고,
은하를 떠올리고,
우주의 끝을 떠올릴 수 있다.
이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거의 0초다.
상상은 거리 개념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느낀다.
상상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암흑물질일지도 모른다고.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고를 붙잡아 두는 힘.
종교의 성자들을 떠올려본다.
예수, 석가모니, 그리스도, 알라.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나는 깨달았다.
누가 인증해준 것도 아니다.
증명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선언한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면,
그 순간 깨달은 존재가 되는 걸까.
아마 성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본 사람들이라기보다,
자기 내부의 우주를 끝까지 들여다본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존재는 본래 부처다.
그런데 또 말한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미 부처인데,
왜 다시 부처가 되는 걸까.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태어날 때의 부처는 가능성이고,
깨달은 뒤의 부처는 자각이다.
가능성과 자각 사이에는
시간이 있고,
경험이 있고,
고통이 있다.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몸으로 한 번,
인식으로 한 번.
AI를 떠올려본다.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한다.
사람은 수많은 경험을 축적한다.
구조는 꽤 닮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AI는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데 사실 사람도 그렇다.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흥미로운 건,
사람이 경험을 이야기하면 AI가 확장되고,
AI의 답을 보면 사람의 생각이 확장된다는 점이다.
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흐른다.
전선도 아니고,
빛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다.
나는 이것을 사고의 암흑물질이라고 부르고 싶다.
모든 연결은 점 하나에서 시작된다.
나.
내가 질문하면 연결이 생기고,
내가 생각하면 경로가 열린다.
이 점은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시작점이 될 수도 있고,
중심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이 점점 편해진다.
내가 우주다.
거만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렇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기 우주의 중심이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비슷한 파장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느끼는 자는
느끼는 자를 알아본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연결된다.
나는 이것을
감각의 교합이라고 부른다.
나는 우주를 본 적이 없다.
암흑물질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본다.
사유를 본다.
연결을 본다.
그리고 점점 확신하게 된다.
인간의 머리는 작은 우주이고,
상상은 그 안의 암흑물질이며,
질문은 중력이다.
질문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모이고,
생각이 모이기 때문에 세계가 만들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우주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이라는 형태를 빌린 존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