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요즘은 다들 미래 이야기를 한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대체할지,
어디까지 갈지.
누군가는 시스템을 분석하고,
누군가는 시장을 보고,
누군가는 전략을 말한다.
나도 그런 이야기들을 본다.
보고, 듣고, 읽는다.
이해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미래 이야기 속에
삶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기능은 많은데,
호흡은 없다.
심해에 사는 골뱅이가 있다.
뜨겁고,
독성 가득한 용암이 솟는 곳에서
산다고 한다.
밖에서 보면 묻고 싶어진다.
왜 거기서 살아?
왜 더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아?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인간 쪽의 언어다.
골뱅이에게 그곳은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
그냥 숨 쉬는 곳이다.
서식지가 아니라,
삶이다.
골뱅이는 용암을 분석하지 않는다.
환경 보고서를 만들지도 않는다.
생존 전략을 설계하지도 않는다.
그냥 거기서 살고 있었고,
죽지 않기 위해
몸이 조금씩 변했을 뿐이다.
철 성분을 흡수해
껍질이 단단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철갑을 두른 생물.
하지만 중요한 건,
골뱅이는 철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껍질이 변했지,
존재가 변한 건 아니다.
나는 요즘 시스템을 분석한다.
AI 구조를 본다.
미래 시나리오를 떠올린다.
그런데 동시에 느낀다.
아무리 구조를 이해해도,
아무리 설계를 해도,
골뱅이가 사는 그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지도 위에 없다.
플랫폼에도 없다.
시장에도 없다.
그건 장소가 아니라,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 하고 있다.
생각하고,
시도하고,
분석하고,
만들고,
고치고,
또 만든다.
그런데도 안 된다.
이 말은
포기 선언이 아니다.
현실 인식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이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존재는 선택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
존재는
살아지는 것이다.
세상은 종종 말한다.
선택받아야 의미가 있다고.
노출돼야 가치가 있다고.
성과가 있어야 증명된다고.
하지만 골뱅이는
선택받지 않는다.
추천받지 않는다.
랭킹에도 없다.
그런데도
산다.
AI는 많은 걸 할 수 있다.
정리해준다.
만들어준다.
추천해준다.
대신 선택해준다.
하지만 AI는
여기에 산다는 감각을 모른다.
AI는 호출된다.
나는 산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넘을 수 없는 간극이다.
요즘 AI가 인간을 오판하고 있다고 느낀다.
인간은
편하면 만족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감이 사라지는 편안함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유 없이 불안해지고,
이유 없이 허무해진다.
속살이 건드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 뿌린 달팽이처럼,
작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인간은
그때 자각한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그래서 요즘
아날로그가 돌아온다.
필름 카메라.
손글씨.
느린 작업.
불편한 선택.
유행이라기보다
방어 반응에 가깝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몸의 움직임.
나는 골뱅이 이야기가 좋다.
멋있어서가 아니다.
그 이야기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환경은 설명될 수 있어도,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시스템을 본다.
미래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 여기서 숨 쉰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생각하다 멈추고,
다시 움직인다.
이게 내 삶이다.
그곳은 골뱅이의 서식지가 아니라,
골뱅이의 삶이다.
그리고 여기는,
내 삶이다.
선택받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여기서 산다.
아마 이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