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면, 언제나 먼저 도착하는 것은 장면

사진

by 마루

사진을 보면,

언제나 먼저 도착하는 것은 장면이 아니라 온도다.

공기가 얼마나 차가웠는지,

빛이 어느 방향에서 흘러왔는지,

그리고 그 순간, 셔터를 누르기 전 손끝이 잠깐 망설였는지.

그 여자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를 “쥐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작은 생명체를 받쳐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카메라들은 대부분 완벽하다.

초점도, 노출도, 색도 알아서 맞춘다.

하지만 이 상상 속의 필름 카메라는 그렇지 않다.

이 카메라는 늘 조금 늦다.

빛을 바로 믿지 않는다.

한 번 더 머뭇거린 뒤에야 필름 위로 장면을 넘긴다.

그래서 이 카메라는

사진보다 기다림을 기록한다.

여자가 바라보는 것은 풍경일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장면일 수도 있다.

혹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일 수도 있다.

필름 카메라는 그 차이를 묻지 않는다.

잘 나왔는지,

선명한지,

SNS에서 반응이 올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에

빛이 있었다는 사실만 남기자.”

사진 속 색은 쨍하지 않다.

대신 살짝 바랜 듯하고,

조금 흐리고,

어딘가 물기가 있다.

마치 기억이 그렇듯이.

우리는 어떤 순간을 떠올릴 때

해상도를 기억하지 않는다.

노이즈도, 해상력도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것들을 기억한다.

바람이 불었는지,

풀 냄새가 났는지,

누군가 옆에 있었는지.

필름 카메라는

그 방식으로 사진을 만든다.

그래서 이 카메라는

미래의 나에게 말을 건다.

“이 장면이 왜 중요했는지는

나중에 네가 알아낼 거야.”

어쩌면 이 카메라는

사진기가 아니라 시간 저금통에 가깝다.

오늘의 빛을 넣어두면,

몇 년 뒤 열어볼 수 있는.

그리고 그때,

사진 속 여자는 더 이상 모델이 아니다.

풍경도 배경이 아니다.

그날의 내가 된다.

상상 속의 필름 카메라는

완벽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해서,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그래서 더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조금 불편한 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기보다,

시간을 믿기 위해서.

그리고 그 믿음이 남긴 흔적이,

지금 이 프레임 안에

조용히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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