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
개판을 보다가, 밥을 떠올렸다
국회 중계를 틀어두고 있다가
누군가 말했다.
“완전 개판이네.”
말은 가볍게 튀어나왔고,
사람들도 웃었다.
그 말은 욕처럼, 비속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소비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화면보다
그 단어가 먼저 멈췄다.
개판.
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국회의 소란보다
그 단어 안쪽이 먼저 떠올랐다.
개판이라는 말은
요즘엔 난장판, 엉망, 막장 같은 뜻으로 쓰인다.
개가 들어가니 더 거칠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에서 ‘개’는
대개 욕의 앞머리에 붙는 존재다.
개새끼, 개같다, 개판.
그래서 우리는
개판을 그냥
나쁜 말이라고 정리해버린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그렇게 태어났을까.
예전에 부산에서
아주 큰 무쇠솥을 본 적이 있다.
전쟁 통에 쓰였다는 솥이었다.
깊고, 넓고, 사람 몇 명이 달라붙어야
뚜껑을 열 수 있을 만큼 무거운 솥.
그 위에는
쇠뚜껑이 아니라
나무로 짠 판이 얹혀 있었다고 했다.
그 판을 여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던 시절,
그 판이 열리는 순간은
그날의 생존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판을 여는 것.
개(開)판.
열릴 개 자.
판을 여는 개판.
그 시간에는
종을 쳤다고 한다.
밥 먹으러 오라는 신호였다.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질서가 있을 리 없었다.
앞사람을 밀고,
뒤에서 소리가 치고,
아이를 안은 사람도,
노인을 부축한 사람도
모두 한 그릇을 향해 움직였다.
뜨끈한 밥 한 그릇.
그걸 놓치면
그날은 끝이었다.
그 장면은
난장판이었을 것이다.
아비규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무례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때의 개판은
욕이 아니었다.
열림이었다.
개판 오 분 전.
이 말이 지금처럼
웃자고 쓰이는 말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곧 판이 열린다.
곧 밥이 나온다.
곧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 긴장과 몰림과 소란이
이미 그 말 안에 들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전쟁이 끝나고,
밥이 넘치게 되자
그 단어는 제자리를 잃었다.
열림의 의미는 사라지고,
혼란만 남았다.
우리는 그 혼란만 떼어내
욕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우리가 쓰는 단어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다.
승이라는 말,
가지다라는 말,
개판이라는 말.
겉만 보면
지금의 뜻만 보인다.
하지만 그 단어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늘 어떤 몸의 경험이 있었다.
배고픔,
두려움,
기다림,
몰림,
살아남아야 한다는 감각.
단어는
그걸 품고 태어났다.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권이었다.
지금은 순수 한국말처럼 느껴지는 말들 안에도
한자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개판의 개는
강아지 개가 아니다.
도구도 아니고,
맹견도 아니다.
열 개 자다.
한글은 소리글자지만,
그 소리는 허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보는 시각의 언어,
듣는 청각의 언어,
사색하는 언어가
겹쳐져서 만들어진다.
단어 하나는
발음 하나로 태어나지 않는다.
경험이 겹치고,
역사가 겹치고,
몸의 기억이 겹쳐져서
하나의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개판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이 너무 가볍게 쓰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 말 안에는
뜨거운 밥 한 그릇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숨소리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언어는
박물관에 있는 유물이 아니다.
지금도 쓰이고,
지금도 닳고,
지금도 오해받는다.
하지만
가끔은
단어 하나쯤
멈춰 세워도 좋지 않을까.
국회에서
“개판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잠깐
그 무쇠솥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판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을.
그날의 개판은
욕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한 열림이었다는 걸.
단어를 볼 때
겉만 보지 말자.
그 속을 보자.
아픔이 있고,
그 아픔 안에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 안에
우리가 잊어버린 삶의 감각이 있다.
개판이라는 말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지금
너무 쉽게 욕하고,
너무 빨리 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단어 하나를
조금 오래 들여다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예의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