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셔터

The Invisible Shutter

by 마루

보이지 않는 셔터

(The Invisible Shutter)


1. 700나노미터의 절벽

캐논 R6 Mark III 렌즈 옆에서
붉은 AF 보조광이 번뜩였다.

700나노미터 언저리의 가느다란 파장은
어둠 속 피사체를 찾으려 애썼지만
두꺼운 콘크리트 벽 앞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렌즈는 벽 앞에서 멈춘다.

빛은
벽을 넘지 못한다.

나는 카메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결국… 빛의 한계인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방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단지 그 빛이
가시광선이 아닐 뿐이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전자기파.

와이파이(Wi-Fi).

사람들은 그것을 인터넷 신호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공간 전체를 스캔하는
보이지 않는 센서다.


2. 미애의 공포

“오빠… 정말 아무것도 없대.”

미애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경찰도 왔고
보안 업체도 왔어.

카메라도 없고
도청기도 없대.”

잠깐의 침묵.

“…근데 느껴져.”

그녀는 숨을 삼켰다.

“누군가 계속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가방을 열었다.

카메라 렌즈 대신
손바닥보다 작은 보드 세 개를 꺼냈다.

ESP32-S3

만원짜리 장난감.

하지만 오늘
이것이 나의 렌즈다.

나는 그것을
벽을 따라 삼각형 형태로 배치했다.

“미애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들이 못 찾은 건
카메라야.”

노트북을 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렌즈 없이도
사람을 보는 방법이 있어.”

3. 멀티패스

와이파이 전파는
직선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벽에 부딪히고
천장에 튕기고
가구에 반사된다.

그리고 방 안을
거대한 거미줄처럼 채운다.

공학자들은 이것을

멀티패스(Multipath)

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전파의 그물망은
사람의 몸에 닿는 순간

아주 미세하게
뒤틀린다.

문제는
그 왜곡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노이즈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사진가다.

수십 년 동안
빛 속에서 노이즈를 제거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 감각을
AI 알고리즘으로 옮겼다.

이 시스템의 이름은

Loovue

빛 대신
전파를 인화하는 렌즈.


4. 듣는 셔터

나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대신
헤드폰을 썼다.

그래프 대신
소리가 흘러나왔다.

CSI 데이터는
주파수로 변환된다.

전파의 위상 변화는
음정이 된다.

방 안이 고요할 때
소리는 일정하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숨이 움직였다.

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미소 지었다.

“찾았다.”

벽 너머에서
누군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5. 사각지대

“그놈은 옆집 벽에 붙어 있어.”

미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네 움직임 때문에
와이파이 패턴이 계속 바뀌어.”

“그럼… 그 사람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보고 있었어.”

범인은 단순한 스토커가 아니었다.

그는
Passive Wi-Fi sensing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단지
공간에 이미 존재하는 와이파이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보안 업체도
찾지 못했다.

그는
완벽한 사각지대에 숨어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그저 눈먼 사진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6. 인화

CSI 데이터만으로는
범죄를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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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진가이자 감정기록자입니다. 사람들의 말보다 더 진한 침묵, 장면보다 더 오래 남는 감정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와 노트북를 늘 곁에 두고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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