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에 대하여

영감

by 마루

발견에 대하여

영감이란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거창한 장면을 떠올린다.

고독한 방, 길게 이어진 침묵, 혹은 번쩍이는 깨달음.


하지만 영감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


1976년, 미국의 밴드 와일드 체리는 디스코 열풍이 한창이던 클럽에서 록을 연주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맞지 않았고, 관객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쉬는 시간, 누군가가 무대를 향해 소리쳤다.

“펑키한 음악 좀 해봐.”


그 말은 친절하지 않았다.

공연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리더 롭 패리시는 그 말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거기서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사를 써 내려갔다.


그 곡이 빌보드 1위가 된다.


비난이 재료가 된 순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비난 속에서 이미 재료를 알아본 순간이다.


나는 가끔 언어를 모른 채 음악을 듣는다.

가사가 들리지 않을 때, 리듬만 남는다.


그때는 이해하지 않는다.

먼저 반응한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감각이 먼저 붙는다.


그리고 나중에 번역을 한다.


그제야 보인다.

아, 이 사람은 여기서 길어올렸구나.


그 감정이 왜 여기서 멈췄는지,

왜 이 타이밍에 터졌는지,

왜 이 리듬을 선택했는지.


그제야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 보인다.


발견은 그런 순서로 온다.


먼저 오는 건 감각이고

나중에 따라오는 게 의미다.


대부분은 이 순서를 뒤집는다.

이해하려고 먼저 달려들고,

설명으로 감각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건

대개 오래 남지 않는다.


설명은 머리에 남고,

감각은 몸에 남는다.

오래 남는 건 몸이다.


롭 패리시는 그 순간을 지나치지 않았다.

비난을 해석하지 않고,

먼저 받아들였다.


그게 리듬이 됐고

문장이 됐고

결국 하나의 곡이 됐다.


영감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나가고 있는 것 중에서

멈춰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설명보다 먼저 반응해본 사람에게만 보인다.


작가의 말

어항

밖에서 보는 눈이 있다.

크고, 가만히 있고,

깜빡이지 않는다.


나는 물고기다.

물과 유리벽만 본다.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눈에는

내가 보인다고 한다.

굴곡을 지나,

왜곡된 채로.


정확하지 않다.

그래도

아무도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


유리벽 사이에서

손을 편다.

반사된 손이 겹친다.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닿지 않는다.


이게 우스운 짓인 건 안다.

근데


이게

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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