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족
남해 지족구, 18킬로미터 전
표지판이 꺾였다.
남해까지 18.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뭔가 시작됐다는 걸 알았다.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 바뀌는 느낌.
그게 여행의 시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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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시장 입구에
사람이 없었다.
근데 이상하게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누군가 있다가 간 자리.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의자 같은 것.
'어서오시다'라는 말이
공기 중에 걸려 있었다.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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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벽들이 튄다.
노란 것, 벽돌인 것,
글씨가 지워지다 만 것.
새로 칠한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게 그냥 남아 있는 것들.
서울 골목 카페들이
오래된 척 새로 만든 것들이라면
여기는 그냥
오래된 것들이다.
그 차이가
사진을 찍을 때 손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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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 유리 안쪽.
걸려 있는 사진들이
요즘 카메라로 찍은 것보다
더 오래된 얼굴을 하고 있다.
해상도가 낮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다르게 담겨 있어서.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냥 오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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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옥.
간판이 먼저 말을 걸었다.
밥집인데
이름이 집 같다.
들어가면
누군가 이미 앉아서
국 떠먹고 있을 것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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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쪽 빵집.
벽에 꽃이 그려져 있었다.
창문이 작았다.
빵 냄새는 없었는데
따뜻했다.
그런 게 있다.
냄새가 아니라
온도로 기억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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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는
바다보다 골목이 먼저 생각난다.
파도 소리보다
지붕 아래 조용한 것들.
관광지가 아니라
생활이 흘러가고 있는 곳.
그래서 사진보다
기억이 더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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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나오는 길에
그 표지판을 다시 봤다.
지족구거리 →
화살표는 그대로였다.
근데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여행은 항상 그렇게 끝난다.
같은 길인데
다른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