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야기
라 페, 평화라는 이름의 배
거제조선해양문화관 안에는 유리 케이스 하나가 있다.
그 안에 배가 한 척 있다.
작고, 조용하고, 돛을 편 채로.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La Paix. 프랑스. 평화.
1763년에 만들어진 이 배는 전함이 아니었다.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이었다.
향신료와 비단을 싣고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오갔다.
그런데 하갑판의 포문은 가짜였다.
진짜 대포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 크고 강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이름도 그렇다.
라 페는 7년전쟁이 끝난 직후에 건조됐다.
그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졌다.
인도를 잃었다.
북미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무역선 하나를 만들어 이름을 붙였다. 평화.
이기지 못한 전쟁의 끝을 평화라고 부르는 것. 가짜 포문으로 진짜인 척 버티는 것. 어쩌면 그게 이 배의 진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배는 세 번 동쪽으로 떠났고, 세 번 돌아왔고, 1771년에 퇴역했다.
아무 전투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물건을 날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생애였는지, 나는 모른다.
유리 케이스 안에서 배는 여전히 돛을 펼치고 있다. 어딘가로 가는 중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