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에 묻힌 아이
《성벽에 묻힌 아이》
– 피와 돌이 기억하는 여섯 날의 이야기
1. 돌의 온기
돌벽은 뜨거웠다.
햇살 때문이 아니었다.
불붙은 화살이 성벽을 스치며 새긴 검은 자국, 튀어오른 불꽃이 돌의 숨결까지 달궜다.
열네 살 최석은 그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엔 논밭에서 굳어버린 굳은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손은 씨앗이 아닌 화살을 쥐고 있었다.
“석아, 물러서지 마라!”
성 위에서 울린 김시민 장군의 목소리는 먼 천둥처럼 깊고 단단했다.
최석은 숨을 고르며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이 매캐했다. 연기와 피비린내가 섞인 공기가 목을 자꾸 태웠다.
그는 잠깐 아래를 내려다봤다. 작은 솥단지를 나르던 여동생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지켜야 한다. 그 마음 하나가, 활시위 위에서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2. 귀신의 울음
쇠구슬 하나가 성벽 위를 느리게 굴러왔다.
비격진천뢰.
숨이 멎는 정적, 그리고—
쾈아앙!
땅이 요동쳤다.
불길과 돌조각이 한꺼번에 솟구쳤고, 상대 위에 선 일본군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살점이 떨어지며 흙 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최석의 뺨을 스친 것은 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 뜨겁고, 무겁고,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조선의 귀신이냐…!”
적진에서 공포 섞인 목소리가 흘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덮은 것은 곧이어 쏟아진 조총의 연사음이었다. 성벽이 다시 떨렸다.
최석은 숨을 삼켰다. 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러졌다.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손끝에서 작은 떨림이 번졌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이었다.
3. 어머니의 손
“석아, 고개 숙여라!”
성 아래서 어머니 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동생과 함께 끓는 기름을 나르고 있었다.
순간, 상대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어머니의 목을 꿰뚫었다.
솥이 기울어졌고, 기름이 쏟아지며 뜨거운 증기가 피와 함께 치솟았다. 여동생의 비명은 기름 끓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어머니…?”
최석은 성벽을 붙잡았다. 눈앞이 붉게 번졌다. 성벽 돌 틈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발목을 적셨다. 그 피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입안에 들어온 피맛이 달콤한 철 냄새를 남겼다. 그 맛을 뱉어내지 못한 채, 그는 활을 다시 움켜쥐었다.
살아야 한다… 석아…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4. 여섯 번째 날의 붉은 하늘
“쏴라! 물러서지 마라!”
장군의 외침이 성벽 위에서 터졌다.
불화살과 돌, 그리고 다시 굴러간 귀신폭탄이 적진을 집어삼켰다. 상대는 기울었고, 일본군의 깃발이 흔들렸다. 물러나는 발자국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최석은 그 광경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조총 한 발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성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석양이 성벽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장군님… 우리가… 이긴 거죠…?”
목소리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활시위를 잡은 그의 손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손가락은 활에 달라붙은 채, 그렇게 굳어갔다.
5. 돌 틈새의 시간
“박 선생님, 이걸 좀 보십시오.”
문화재 탐방단의 연구원이 성벽 균열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손뼈였다.
활시위를 당긴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고, 옆에는 부서진 활과 녹슨 비격진천뢰 파편이 함께 묻혀 있었다.
연구원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손전등 불빛에 비친 손가락 마디엔, 오랜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은 깊은 홈이 있었다. 활시위를 오래 당겼던 흔적이었다.
바람이 성벽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연구원은 문득, 피빛 석양 아래 활을 쥔 어린 소년의 떨림을 본 듯했다.
“이 작은 손이… 성을 지켰군요.”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속에 묻혀 조용히 사라졌다.
작가의 말
진주성 돌담에 손을 얹었을 때, 단단한 돌 틈에서 묘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 속엔 이끼 냄새와 바람이 아니라, 수백 년 전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역사는 돌로 쌓이지 않는다.
활시위를 잡던 작은 손가락, 가족을 부르던 어린 목소리, 그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로 역사의 살결이다.
열네 살의 최석은 아직도 그곳에 서 있다.
이 글은 그에게 보내는 조용한 답장이다.
“네가 지킨 성은 지금도 서 있다.”
— 2025년 여름, 진주성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