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15. 오래된 습관으로부터

성장 경험

by 박진희


눈을 떴을 때 오전 5시였다. 알람을 킨 것도 아닌데 5시의 언저리에서 몸이 알고 일어나게 된 게 벌써 수개월째다. 다시 잠을 들이기엔 애매한 시간이어서 남편이 잠든 어두운 방을 더듬거리며 나와 서재로 갔다. 요가 매트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심호흡을 했다. 어제의 작은 소요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상장을 들고 문화센터로 뛰어들온 아이가 활짝 웃었고, 온전히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저 상 받았어요!"

"아! 그 글짓기 대회 발표났구나!"

"네!"

"정말 축하한다!"

"헤헤, 학교로 상장이 왔어요. 장려상요."

아이는 수상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 즐거워 보였다. 청소년 글짓기 대회가 있어 문화 센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3주간 글쓰기를 하게 했다. 독서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인 관계로 큰 상은 아니더라도 장려상 한 명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아무런 성과가 없을 확률이 더 높다는 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던 터라 수상 소식은 깜짝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날 독서 수업을 온 아이들은 파티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상은 아이가 받았는데 턱은 지도 선생이 낸다는 게 좀 우습긴 했다. 하지만 이런 턱이라면 기꺼이 낼 수 있었다.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턱을 내는 건 아주 저렴하기도 했다.

"그래 뭘 먹고 싶니?"

"아이스크림요!"

"그래 좋아. 자기가 원하는 아이크림을 적어 주면 이 몸이 친히 사 오도록 할게."

“우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대신 30분 독서하고 아이스크림 먹는 거다."

"네!"

아이들는 모두 정해진 분량의 독서를 끝내고 들뜬 표정으로 자신이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적었다. 마을 수퍼에서 급하게 공수해온 아이스크림을 누구 하나 시시하게 여기지 않았다.

"선생님, 다음에 우리가 또 상 받으면 그때는 과자 파티도 하고 아이스크림 두 개씩 먹어요."

손에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던 성민이가 말했다.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란 게 고작 과자와 아이스크림이었다. 학폭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학교를 생각하면 이런 순수함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지만 실제로 가까이서 맞이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소박하다. 물론 학교 보다는 다소 느슨하고 마음이 변하면 언제라도 거부할 수 있는 문화센터 독서 수업이란 특수한 상황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너무 괴로우면 안 와도 된단다. 이곳은 의무 교육기관이 아니니까."

목소리를 높이거나 인상을 쓰지 않고도 단번에 소요를 잠재울 수 있는 견고한 문장이다. 어쩌면 안해도 된다는 자유를 아이들은 버리고 싶지 않은 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 독서 시간은 그닥 괴로운 시간이 아닌 것도 같고, 가끔이라도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자부심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아이들이 이 시간에 참여하는 의미를 매 시간 일러준다. 일테면 이런 식으로.

"어제 mb*뉴스에 조세이 탄광이야기가 나온 거 본 사람 있니?"

수업 전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아무리 반항적인 아이라도 일단 집중한다. 대답하는 아이들이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하는 질문이니 오래 뜸들이지는 않는다.

"조세이 탄광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일본인 민간단체에서 기금을 조성해 발굴작업한 내용을 보도했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검은 바다>의 배경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이라는 걸 너희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초등학생들 중에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용으로 해저 탄광에 끌려가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 거 라고 생각해? 아마도 너희들을 포함해 몇 안 될 거야. 그만큼 너희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란다. 일본 민간인들도 우리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마당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오늘 이렇게 모여 책을 읽는 것도 관심의 시작이란다."

이쯤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읽던 페이지를 찾아 책을 펼치며 진지한 표정으로 독서를 하게 된다. 독서의 즐거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을 상대로 독서의 가치를 전달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에 더해 글쓰기 대회에 참여하는 경험은 또 다른 특별함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대회까지 생각하는 자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다음에 또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는 과자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두 개씩 선생님이 쏜다. 대신 글쓰기 하라고 하면 빠지지 말고 참여하는 거다."

"네!"

아이스크림을 먹던 아이들이 동시에 떼창으로 답했다. 처음 독서와 글쓰기 수업을 하자고 했을 때 주리를 틀던 아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독서를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아이들의 속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전과 태도과 많이 달라진 건 분명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시나브로 만들어지는 것들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이라고밖에 정의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러 차례 목격되는 마법같은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와서 다시 독서를 위해 한 시간 넘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걸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싫어 한다고 포기하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저자극 중에 저자극인 책으로 아이들을 붙든다는 건 참여하는 학생이나 지도하는 선생에게나 고문에 가까운 일이라고 사람들은 아주 쉽게 말하곤 했다. 어떨 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조차 서가에 빼곡하게 꽂힌 고전을 보며 ‘보기만 해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자신이 독서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본인 스스로 실토하는 것으로 보였다. 긍정적인 독서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굳이 독서를 강요하거나 가치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달랐다. 늘 마음이 쓰였고 미약하나마 작은 역할을 하고 싶었다. 우리 마을은 지역의 돌봄 기관에서 저녁 7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문화센터를 이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골에서 아동·청소년을 빼면 성인만을 위한 문화센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화센터의 쓰임이 좀 더 다채롭고 유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공을 살려 강사를 쓰지 않고 독서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기 시작했다. 독서도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독서 감상문을 적어라고 했을 땐 대부분의 아이들이 몇 줄조차 적기 힘들어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완독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접근해 한 바닥 읽기와 한 줄 쓰기로 시작한 독서가 2년을 훌쩍 넘긴 것이다. 지금은 열 페이지 읽고 한 장 독서 감상문 쓰고 의견을 나누는 활동으로 성장했다. 이런 성장은 부과적인 성과까지 보여주었다.

"수현이가 태도가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반항적이기만 하던 투덜이가 엄청 고분고분해졌으니까요. 요즘은 애교까지 떨고 말예요."

아이들을 인솔해 주시는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전달하겠다며 가장 큰 성과로 수현이의 태도 변화를 거론했다. 수현이의 태도 변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이 특별히 재미있거나 교훈적이라서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신화의 내용은 그야말로 살육과 근친 상간도 모자라 시샘과 응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들을 초등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이 되었지만 신화는 어차피 인간의 상상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상징적인 부분이 많다며 얼버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복잡미묘한 세계를 피상적으로나마 이해를 하는 것 같았고, 때로는 흥미를 가지기도 했다. 저 자극적인 책에 몰입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자체의 효과는 시나브로 나타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얀 종이 위에 빼곡히 채원진 글과 내용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주기적으로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정서가 차분하게 정리되는 순간을 경험했다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직업 특성상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고, 노년과 중장년층, 젊은 청년과 아동청소년까지 아우르다 보면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가 많다. 한 번씩 머릿속을 정리하지 않으면 도무지 일상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슴에 손을 얹는 행위만으로도 많은 허상들이 사라졌다. 이에 더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호흡과 몸의 자극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우주적 공간에 홀로 놓이게 된다. 주말을 제외한 주중 명상은 2년 아니 3년을 넘기면서 중요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책상에 오래 앉아 일하면서 생긴 목디스크와 척추 통증도 팔 할 정도는 개선된 느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를 열었고,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아이들이 문화센터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독서를 하기 위해 오는 아이들은 소요를 일으키며 앞을 다투며 뛰어 들어왔다. 이거면 충분했다.

"페이지 125, '17장 나가사키 조선소로' 펼친다. 지금부터 10분간 묵독한다. 시작!"

백 미터도 채 되지 않은 거리를 뛰어오느라 볼이 붉어진 아이들이 숨을 가다듬는다. 사부작거리던 손이 어느새 책을 잡고 고요히 묵독을 시작한다. 5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사부작거리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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