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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Aug 25. 2022

대본 없이 연기하는 사람들

연기는 인생보다 진지하게, 인생은 연기보다 가볍게


배우들만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배역을 맡아 매일 연기를 하고 있다. 혈연과 결혼에 따라 정해지는 배역도 있고, 직업과 종교 등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배역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역할이 바뀌기도 한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악역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고, 가끔은 운 좋게도 내가 원하던 배역을 맡을 도 있다. 다만, 배우들과 다른 점은 원하지 않는 배역도 어쩔 수 없이 맡아야 고, 대부분 대본 없이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이 한 명도 없어도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배우들과 다른 점이다.


자식으로 시작한 연기는 결혼을 하면서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얼마 뒤에는 부모가 되고, 친인척 관계에 따라 다양한 배역을 맡는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이가 들면 할아버지 할머니 역할을 끝으로 무대에서 내려와 원래 있었던 우주로 다시 돌아간다. 집 밖에서는 가장 먼저 친구 역할을 하고, 학생 배역으로 오랫동안 연기를 하다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배역을 맡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생 한 가지 배역만 맡을 수는 없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배역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역할도 있다. 가끔 악역과 비극의 주인공 역할을 할 때도 있는데 후유증이 오래 남는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바꿔가며 연기를 하다 보면, 도대체 어떤 배역이 나의 진짜 모습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도 있다. 



10대 후반까지 내가 맡은 배역은 지방 작은 도시에서 가난한 집안의 자식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밝고 쾌활한 아이, 철없이 방황하는 청소년, 부모에 순종하는 조숙한 모범생 등의 연기를 경험하면서 배우로서 기초를 다졌다. 서툰 연기 때문에, 때로는 너무 실감 나게 연기하는 바람에 감독으로부터 야단을 맞을 때도 많았다. 출연료는 없었지만 숙식 제공, 학교 지원, 기초적인 생활비 등을 제공받았다.  

짧았지만 무난하게 소화한 모범생 연기력을 인정받아 다음 배역은 대학생 역할이었다. 아역 배우 시절의 다져놓은 연기력 덕분에 대본 없이 연기하는데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출연료는 여전히 없었지만 학비와 생활비는 더 높게 책정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그렇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출연료에 혹하여 직장인 배역을 선택하였다. 출연료를 받는 날은 기분이 좋았지만, 직장인 역할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감독은 상당히 깐깐한 스타일이었고 동료 배우들의 연기력이 워낙 좋아 위축이 되었다. 단역 배역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출연료가 꼬박꼬박 잘 나오는 편이어서 꿋꿋하게 버텼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나에게도 드디어 조연의 기회가 찾아오면서 자존감은 출연료와 함께 상승하였다. 어렵게 잡은 조연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시키지도 않은 연기 연습을 하며 열연을 펼쳤다.


직장인 연기를 한참 하던 중  여배우를 만나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부부 역할을 맡기로 하였고, 부족한 연기력을 서로 보완하면서 각자의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작품은 상대 배우와의 호흡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얼마 뒤에는 부모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맡은 배역 중 가장 소화하기 힘든 역할었다. 다행히 여배우의 지혜로운 즉흥 연기와 처음으로 미리 준비한 대본으로 맡은 역할을 겨우 소화하고 있다. 자식 역할을 맡은 젊은 배우가 조금만 더 연기력이 좋아진다면 훌륭한 작품이 될 것 같은데, 우선 부모부터 연기력을 더 세심하게 다듬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나의 연기 인생을 돌이켜보면 내가 선택했던 배역들보다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역할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오랜 연기생활에 지쳐서인지 이제는 좀 무난한 배역을 맡고 싶다.

한편으로는, 쉬운 배역과 힘든 배역의 기준은 원래부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맡았던 배역들 모두 나의 연기 인생을 보람되가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족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숙식을 제공받았고 지금도 출연료를 받고 있으니 연기자로 살아가는 인생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대본 없이 연기하다 보니 실수가 잦았고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한편으로는 대본이 없었다는 것이 연기를 실감 나게, 더 깊이 있게 만들었 . 대본대로 연기는 뻔한 작품(인생)끔찍하게 재미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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