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사비니 여인들'부터 시작해야 한다. 로마 건국 신화에 얽힌 전설이지만, 이 사비니 여인들이 로마 여인들의 시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야 했던 당시 로마가 당면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로마 제국의 건국 신화에 타 부족 여인을 납치하여 강제 결혼을 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범죄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이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로마와 사비니 부족 간 전쟁을 멈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화해와 통합이라는 훌륭한 교훈을 남기면서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족들 간 수많은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림 속 사비니 여인들의 간절한 외침과 애원하는 모습은 수백 년간 수많은 전쟁과 함께 살았던 로마 여인들이 겪게 될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고 제국으로 발전한 제정 시대에는 물자와 노예가 넘쳐났다. 검소와 고결함을 자랑하던 로마는 장기간의 평화와 주체할 수 없는 풍요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를 통해 익숙한 로마 제국 여인들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모습은 바로 이 향락의 시대를 살았던 귀족 상류층 여인들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그러하듯 평민 여인들의 삶은 귀족 여성들이누렸던 부귀영화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부와 권력의 독점으로 시골 농장은 대부분 소수 귀족들의 소유였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평민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궁핍한 삶이었다. 일부 평민들은 시골을 떠나 로마 시내로 흘러 들어갔지만, 사회 밑바닥의 거친 생활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에서 무상으로 배급하는 밀과 지원품에 의지하며 고달픈 인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평민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꿔줄 만한 기회는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공화정 시대 중반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징집을 하다가, 나중에는 대규모 상설 군대를 운영했다. 봉급과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긴요한 소득원이었다.
문제는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할 확률이 너무 높았다는 것이다. 도시 국가였던 로마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횟수가 빈번해지면서 사상자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다. 한번 전쟁을 치를 때마다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심지어 수 만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 남편과 아들, 오빠와 남동생의 무사생환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로마 여인들의 애타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령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집과 비통한 통곡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통곡으로 바뀌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통곡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사망확률이 낮긴 했지만, 귀족들도 이 고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느 한 세대를 잘라서 보더라도 로마 평민들 중 유가족이 아닌 집은 거의 없었다. 국가 차원의 보상과 지원이 있었지만, 가족(특히, 가계를 책임지던 가장)을 잃은 무산 계급 유가족의 삶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전사자들이 많다는 것은 곧 미망인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족 여성들의 경우는 돈과 가문이 있었기에 재혼이 비교적 용이했다. 가장이 없어도 아이들을 키워 줄 훌륭한 친인척들이 있었고, 집안에는 교육과 육아를 맡아줄 노예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평민 여성들이 처한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중요한 소득원이 사라진 집안에서 여성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세지면서 로마는 자연스럽게 모계 중심의 사회로 변해갔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들의 여럿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고결하고 현명한 어머니의 대명사였다.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해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로마에는 수많은 훌륭한 여성들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로마의 여인들은 근현대 격동의 시대를 모질게 견뎌낸 한국의 강인한 어머니들과도 많이 닮았다.
한편, 로마 사회는 남자들의 숫자가 늘 부족했다. 전쟁을 한 번씩 치를 때마다 성인 남자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남녀 성비의 불균형은 또 다른 사회 현상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전쟁미망인들에게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재혼과 사교의 자유가용납되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조선 시대만큼이나 남녀 간 불평등이 극심한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딸은 아버지가 정한 혼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편이었고, 이혼과 재혼까지도 가장인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정숙함을 요구했고, 공개된 장소에서 남녀 간 가벼운 접촉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에게 대체로 순종하는 편이었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가족에 대해 가장이 처벌(심지어 처형까지)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장이 살아있을 때의 얘기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을 위해 평생 추모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살라고 요구할 만큼 로마 사회는 가혹하지 않았다. 로마는 실용적이고 지혜로운 사회였다.
로마 사회는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고, 전사률이 높아 재혼을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상속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미망인은 남편 사망 후 10개월이 지난 다음에 재혼할 수 있었다.
설사 혼자 사는 미망인이 누구를 만나더라도 부도덕한 상황만 아니라면 문제 삼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기보다는 누구에게나 닥칠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이별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삶의 허무함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