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를 제외하면 혈연관계의 세습을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들이 모두 암군이었던 반면, 네르바부터 마르쿠스에 이르기까지 양자 관계로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모두 명군이었다. 그리고 양자 대신 혈연관계에 의한 세습이 다시 시작하자마자, 로마의 붕괴는 재개되었다. <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약 2천 년 전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이 센 상속자는 단연 로마 제국 황제였다. 권력이 미치는 범위와 파워, 통치 지역 내의 다양한 문명과 영향력 등을 고려할 때, 다른 군주국가들의 상속자들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제정 시대가 열렸지만 1인 지배 체제를 극도로 거부했던 500년간의 공화정 역사가 버티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이러한 기질을 잘 알고 있는막강한 상속자 아우구스투스는 신중한 모습으로 구체제와싸우고 있었다. 탁월한 영민함과 뛰어난 연기력을 무기로 서두르지 않으면서 신속하게 황제 시대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해 갔다.
아우구스투스의 나이가 고령으로 접어들 무렵, 제정 체제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건설한 새로운 제국을 승계할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속마음을 감추던 아우구스투스였지만, 승계 문제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의도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혈통을 통한 세습 승계가 율리우스 가문과 제국의 번영을 지켜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피가 섞인(가능한 농도가 짙은) 후계자를 제위에 앉히기 위해 황제로써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다. 신들의 노여움을 살만한 일까지 저지르며 한 가닥의 핏줄이라도 연결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다.
단 한 방울의 피가 아쉬운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첫 번째 부인 스크리보니가 딸을 출산한 직후에 이혼을 하고 리비아와 재혼했다.
리비아는 아이가 둘(그중에 하나는 배속에) 있는 유부녀였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와 뿌리칠 수 없는 욕망으로 남편을 버리고 황제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 사이에 끝내 아이가 생기지 않자 전처에서 낳은 딸 율리아를 자신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 아그리파는 결혼한 몸이었지만 황제의 요구에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와 아그리파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중 두 명을 황제가 입양했지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모두 사망했다. 나머지 한 명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입양을 포기했다.
사위인 아그리파가 사망하자 이번에는 돌싱이 된 딸 율리아를 황후가 재혼 시 데리고 온 아들(티베리우스)과 결혼시켰다. 티베리우스 또한 결혼한 상태였지만, 황제의 요구로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신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와 티베리우스 사이에는 끝내 후손이 나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이혼했다. 이후 율리아는 연이은 불륜 행각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 섬에 유배되어 있다가 사망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한 아우구스투스는 핏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내려놓고 제국의 안정을 선택했다. 결국, 의붓아들이자 사위인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제위를 물려주었다.
비록 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후대의 계승자들에게는 하나의 선례가 되면서 양자 승계는 로마 황제들의 전통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덕분에 로마 황제들의 피의 농도는 물보다 연해지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승계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유연함과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양자 승계는 카이사르부터 시작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본의 아니게 그러한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제정 시대 전체로 봤을 때 친자 승계보다는 양자 승계 혹은 추대에 의해 등극된 경우가 더 많았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였다고 칭송한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은 양자를 조기에 입양한 후에 제왕 수업을 통해 후계자를 양성했다.
하지만, 오현제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함량 미달인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황제 자리(루키우스 베누스 다음 황제)를 물려줌으로써 완벽에 가까운 철인 황제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세계 최고의 권력과 부를 물려주면서도 혈통에 연연하지 않았던 가장 큰 요인은 로마인들 의식 속에 깊이 박혀있는 '실질강건'의 전통과 스토아파 철학의 영향이 여전히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우구스투스가 고수한 일부일처제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시대의 군주들처럼 아들을 보기 위해 여러 후궁을 들이지 않고 끝까지 일부일처제의 원칙을 지켰다.
특이한 점은 로마 황제들에게 친아들이 없거나, 아예 무자식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후대의 계승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황궁 내에서 퇴폐적인 음란행위들은 많았지만, 후궁으로 인정받은 여인은 없었다. 어느 날 아이를 안고 나타나 친자 소송을 벌이는 일이나 자식들 간 목숨을 건 후계 싸움은 극히 드물었다.
로마가 보여준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성이 다른 양자가 제위를 물려받거나, 병사들의 추대로 속주 출신의 군단장이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황실과 로마 사회가 보여준 차분하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근위대에 의한 황제 암살과 군단들 간 소규모 내전이 벌어질 때 조차도 로마 사회의 질서는 평온하게 유지되었고,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었다. 혼란과 동요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신속한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었지만, 로마 사회는 이 한 명에게 절대 충성을 하지는 않았다. 필요할 때는 추대했지만,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버렸다.
황제와 로마 시민 모두의 마음속에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후계자들이 어디든 존재했다. 이러한 믿음과 자신감은 황제가 로마 시민 위에 함부로 군림할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