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에 취하지 않는다

천천히 마시고 조금씩 비운다

by 시원


40대 중반 무렵부터 주량보다 술친구가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세태가 그러하고 내 마음 또한 식어가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술은 갑자기 줄이기가 쉽지 않았다. 비어버린 시간은 자연스럽게 혼술로 채워졌다. 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마시다가 혼자서 마시려니 술맛이 나지 않았다. 술을 삼킬 때 외에는 입을 닫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았다. 취기가 오르면 왠지 처량하기도 하고 무리에서 추방당한 듯한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낯설게만 여겼던 혼술도 마시다 보니 차츰 익숙해졌다.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주 한 잔을 세 번에 나눠 마셔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다. 회식자리에는 언제나 내 주량 이상의 술이 공급되었지만, 기분 좋게 취해본 기억이 없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과 음미하는 술의 취기 순도는 확연히 달랐다.


혼술을 막 시작했을 땐 밥을 먹으면서 반주를 곁들였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근사한 바에서 폼 잡고 한잔 할 여유와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의 귀가 시간이 엇갈리다 보니 저녁은 늘 혼밥이었다. 귀는 TV에, 눈은 휴대폰에, 손은 수저와 소주잔을 오갔다. 그러다 어느 날, 반주는 혼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상 앞에 앉아 있으니 그저 끼니를 해결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밥을 치우고 술을 식탁 가운데로 옮겼다. TV를 끄고 휴대폰을 덮었다. 식탁의 조명을 흐릿하게 낮추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술을 따르는 소리와 술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취기가 퍼지자 여러 생각들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부터 지난여름, 그리고 오래 전의 기억들까지.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까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혼술을 약속처럼 미리 잡는다. 정해진 날은 웬만하면 바꾸지 않는다. 번개로 마시는 날도 있지만, 날짜를 정해두면 혼술이 조금은 의식처럼 느껴진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와인을 둘러보고, 평소에는 잘 사지 않는 치즈를 집는다. 랍게도 와인은 일 년 내내 할인행사(?)를 한다.


술의 주종은 여러 번 바뀌었다. 소주, 맥주, 와인, 양주, 막걸리. 기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술이 달랐다. 힘든 날엔 소주를, 무더운 여름엔 맥주를, 해외 출장을 다녀온 뒤엔 양주를, 명절이 지나면 와인을, 입맛이 없을 땐 밥 대신 막걸리를 마셨다. 돌고 돌아 요즘엔 와인과 막걸리에 정착했다. 그래도 김광석 노래를 들을 때면 소주를 마신다. 안주가 필요 없는 날이다.


혼술 기분에 취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과음을 할 때가 있다. 회식 때의 '버티기 주량'을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에서 마실 때면 언제든 쓰러질 수 있다. 이미 반쯤 비운 와인병을 한참 바라본다. 얼핏 보니 반 이상 남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한잔만 더 마시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잔. 닫았던 코르크를 다시 열어 병을 천천히 기울인다. 3분의 1쯤에서 잠깐 멈칫하다가, 결국 4분의 3쯤 되어서야 멈춘다. 조금 많아 보이지만, 아무튼 한잔이다.


한 번은 집에서 혼술을 하다가 필름이 끊긴 적이 있다. 회사 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다음 날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원칙을 세웠다. 절대 취하지 말자. 취한 모습이야, 그동안 나와 가족들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않겠는가.


빈병을 집안에 쌓아두는 것도 혼술의 분위기를 해치는 일이다. 혼술의 취기에는 추억만 남지 않는다. 추억과 추억 사이에는 수많은 후회와 아쉬움이 그물처럼 얽혀 있다. 추억이든 후회든 빈병에 묻어 있는 감정은 마음속 찌꺼기가 된다. 내가 마신 술의 양을 다음 날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 회식과 모임에서 술을 마실 때면 욕심도 함께 채워졌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고, 내 편을 만들고, 경쟁과 출세를 위해 마셨다. 하지만 그렇게 마셨는데도 원하는 건 잡히지 않았고, 마음은 늘 허전했다. 이제는 혼술을 하며 조금씩 비워가는 연습을 한다. 오늘 저녁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나면, 몸은 조금 피곤하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내일은 해장라면 대신 따뜻한 커피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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