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학교와 연봉, 이 두 가지는 직원들 사이에금기어가 되었다.같은 직급 내에서도 실적과 평가에 따라 연봉 차이가 비교적 크다 보니 서로 묻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 고질병인 학벌 서열화, 사조직과 파벌 형성 등의 폐해를 뿌리 뽑기 위한 회사의 노력과 직원들의 의식 변화로 출신 학교에 대해서도 이제는 상호 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언제부턴가 출신 학교와 연봉 외에 금기어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정치 얘기다. 정치 관련 대화는 그동안 조금씩 줄어들다가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퇴근 후 사적인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화가 자발적으로 정착된 가장 큰 이유는 건전한 토론을 위한 충분한 지식과 기본적 매너에 대해 서로 신뢰할 수없는 상황에서발생하기 쉬운 진흙탕 싸움과 상처만 남는 결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합리적이고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아주 작은 정치 뉴스거리 하나에 어떻게 돌변하는지, 얼마나 빨리 이성을 잃어버리는지 경험을 통해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부모일 수도 있고,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오래된 인연으로 형성된 인간관계가사소한정치 견해 차이로얼마나 쉽게 니 편 내 편으로 갈라지는지모두가 잘 알고 있다.직장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친밀한 관계라도 자신의 속마음을 절대 오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있는 것이다.
특히, 조직을 관리하는 리더라면 이 점에 대해 가훈이나 가치관 수준으로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불가피하게 의견을 피력하더라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절대적 중립의 자세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신중한 모습은 신뢰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자 덕목이다.
그렇다고 리더가 매사에 지나치게 속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다. 다만, 정치와 관련한 이슈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리더는 침묵 혹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 본인과 조직 구성원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립은 진보와 보수의 중간에 위치한 중도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이다. 어차피 이 땅의 진영 싸움은 정치적 이념과 철학과는 거리가 멀지 않는가.
정치 성향은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님에도,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면 어김없이 두 진영으로 갈라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나 중도적 관점에서 합리적 비판 의식을 가진 사람조차도 "그래서 너는 어느 쪽이야?"라는 압박을 받고 결국 어느 한쪽으로 강제 분류되고 만다.
몇 년 전에 지역색이 비교적 강한 도시에서 파견 근무를 하면서 작은 규모의 조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 직원수는 15명이었고 4050 세대 남성 직원들의 비중이 높았다. 사무실분위기와 직원들의 성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본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들의 하루는 아침 출근길에 들은 정치 뉴스에 관한 토론으로 시작된다.금방 끝날 것 같던 시사 토론회는 어김없이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하면서 논쟁으로 격화된다. 때로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얼굴을 붉힌다.
나는 한 달 정도 지날 무렵 직원들의 성격과 정치 성향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누가 흥분을 잘하는지, 누가 막무가내인지. 격론이 벌어지는 날이면 요주의 인물들과 가능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들의 동선을 피해 다녔다. 눈이라도 마주치다가는 한 시간 이상 시국 논평을 들어줘야 했다.
점심시간에도 이들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야 한다. 맞은편에 앉게 되면 밥을 먹는 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고개를 끄덕거려 줘야한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던 나에게 수십 번 들은 까다로운 질문이 날아온다.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글쎄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이슈여서, 뭐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조금씩 다르지 않을까요?",
"이번에 발표한 저 정책은 잘못된 게 아닌가요?"
"글쎄요.. 모두가 만족하는 정책은 없겠죠"
나의 대답은 점심 메뉴만큼이나 뻔하다. 그렇다고 아주 성의 없이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갱년기에 접어든 꼰대들은 나의 정해진 답변을 알면서도 틈만 나면 '나의 편'이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고 질문을 퍼붓는다.
리더는 자신의 말투에 묻어나는 조그마한 뉘앙스에도 구성원들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정치적 논쟁에 한번 휘말리면 그 후유증으로 인해 리더십에 얼마나 큰 타격을 받는지 자나 깨나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술자리를 조심해야 하고, 반복되는 유도 심문에 지혜롭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내전에 가까운 진영 싸움이 장기화된 한국 사회에서 멀쩡한 리더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니 편과 내편의 물리적 경계는 너무나 명확하고확고하여 종교와 혈연 조차도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가슴이 답답하고 입이 근질거려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누구의 말이 맞고 틀리다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자신과 성향이 비슷하거나 대화가 잘 통하는 직원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평소 정치에 무관심한 듯 말수가 적은 사람을 대할 때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술기운에 가볍게 던진 추임새 하나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치적 커밍아웃이 되어 버린다.
그때부터 직원들의 눈빛과 태도가 달라진다. 리더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반대 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로 갈려진다. 그 상황이 오해이든 진실이든 리더는 직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고정된 인식과 이미지를 바꿔 보려고 다시 말을 많이 하게 되고 행동은 어색해진다. 리더십이 무너지고 조직의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만약 리더가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도 뒷감당을 할 수 있거나,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한 조직이라면 직원들과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리더는 현명한 판단과 지혜로운 처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