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책임을 다하는 일-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노트르담 성당을 가기 전 그 근처 작은 골목길에 있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찾았다. 그곳은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서점 앞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서점 안으로 한꺼번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인원을 제한하고 있었다. 서점 내부를 찍고 싶었으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이곳은 그냥 서점이 아니라 파리 문학의 심장이다. 1919년 실비아 비치가 문을 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처음 세상에 내놓으며 문학사의 전설이 된 서점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문을 닫았지만 1951년 미국 출신 조지 휘트먼이 다시 문을 열었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들이 드나들던 문학의 성지가 되었다.
주인은 "책은 나누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 서점을 젊은 작가와 여행자들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다락방에 머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서점 안 다락방에서 묵으며 글을 쓰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앙증맞은 종이 청아하게 울린다. 약간 높은 문턱을 지나 첫 발을 디디면 낡은 판자의 미세한 울림이 발바닥에 전해진다. 입구 오른편 좁은 계산대에는 연필이 가득 담긴 컵과 영수증, 책, 책 제목 위에 또렷한 흔적은 남기는 서점의 손도장이 놓여 있다. 방금 찍고 간 듯 잉크가 번쩍인다.
서점 통로는 한 사람 반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의 넓이다. 벽면을 따라 제본 방식도, 종이 질감도 서로 다른 책들이 촘촘히 꽂혀 있다. 손때로 반들반들해진 서가 모서리에는 작은 손글씨 표지가 붙어 있다. '시, 여행기, 소설' 분류 표지만 읽어도 금세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하다. 금속 스탠드에서 떨어지는 노란빛이 페이지의 여백을 비추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속삭임이 뒤섞인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을 등지고 놓인 작은 타자기가 있다. 몇 줄 쓰다만 원고지가 끼워져 있는 그곳에서는 엷은 잉크냄새가 난다. 그 옆에는 독자들이 남긴 쪽지들이 핀으로 꽂혀 있다. '오늘의 문장' '여기서 시작했다' 독자들이 남긴 문장들이 서점의 심장박동처럼 마음을 두드린다.
나무 계단은 손잡이의 결이 살아 있다.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임이 따라온다. 그 소리는 발소리라기보다는 누적된 시간의 소리처럼 들린다.
벽에는 이곳의 정신을 담은 문장이 적혀 있다.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
( 낯선 이를 환대하라, 그는 어쩌면 천사일지 모른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서점이 책을 파는 곳을 넘어 누군가의 시작을 열렬히 축복하고 환대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영화 비포 선셋에서도 등장한다. 9년 만에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재회하는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카메라에 비친 서점의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삶과 시간이 교차하는 인연의 무대다.
이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길, 계단참에서 잠시 멈춰 아래를 내려다본다. 서로 다른 언어의 책들이 한 겹의 바다처럼 반짝이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에 오후의 빛이 얹힌다.
문을 나서기 전, 에코백과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간다. 손도장을 책의 속표지에 꾹 찍는다. 잉크 향이 잠깐 피어오르다 이내 사라진다. 이제야 알겠다. 이곳에서는 책은 물건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것을. 페이지마다 내 얼굴이 비치고, 거기에는 시간의 거울이, 우리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증언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이 우리를 만든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내게 남긴 울림은 뚜렷했다. 화려한 간판도, 영화 속 낭만도 아닌 책이 품은 가장 맑고 단단한 목소리.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왜 길 위에 서 있는지를 다시 묻게 하는 진실이었다. 내게 진실의 거울이 되어 주었다. 이 곳은 그 진실을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뜨겁게 속삭여 주는 장소였다.
다운트 북스는 내게 세계를 보여주었고, 노팅힐서점은 인연을 가르쳐 주었으며,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삶의 진실을 비춰 주었다.
세계, 인연, 진실.
세 서점에서 얻은 세 가지 상징은 결국 한 곳을 향했다. 책과 여행은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같은 곳으로 이어졌다.
그 길 끝에는 항상 내가 있었고, 내 여행길을 동행한 어린 왕자가 있었다. 책과 여행은 내 마음을 곁들인 별빛이었다. 그 여정은 나를 길들이는 길이었다.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마음을 길들인다는 일이며, 여행을 한다는 것은 곧 삶에 책임을 더하는 일이다. 내가 길들인 세계, 내가 맺은 인연, 내가 마주한 진실. 그것들은 모두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이것이 책과 여행이 내게 준 가르침이었다. 이제는 내가 지켜야 할 하나의 운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