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져서 괜찮아
지난번 산책길에서 만난 고목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점심을 먹자마자, 설거지해 놓고 옷을 챙겨 입었다. 패딩 코트에 털조끼, 베이지색 모자와 장갑을 쓰고 길을 나섰다.
내 산책길 되돌아오기 전 3분의 2지점에 있는 그곳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생의 얼굴을 만났다. 표지판을 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그 나무를 고목이라 불렀다.
보호수 지정 250년.
나는 그 숫자 앞에서 잠시 멈췄다. 보호수로 지정된 지 250년이라면, 이 나무는 과연 몇 해를 살아온 것일까. 지정되기 전의 시간까지 더하면, 이 나무의 나이는 얼마나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나는 계산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시간의 무게는 내가 감히 셈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숫자로 옮기려는 순간 오히려 가벼워져 버릴 시간이었다.
나무는 이미 시간을 초월한 듯 서 있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적어 둔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왕버들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 있는 곳조차 힘에 겨운 듯, 세 개의 지팡이가 나무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붉은 쇠기둥 들은 나무의 겨드랑이와 허리를 조심스럽게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나이 든 현자가 지팡이를 짚고 잠시 숨을 고르는 이미 한편의 동화였다.
지팡이의 끝은 흙 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다. 마치 땅과 약속을 해 둔 것처럼. 나무는 자연스럽게 기대고 있었다. 세월의 강을 건너온, "아직 여기 있어"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얼굴이었다.
돌계단을 하나씩 딛고 올라 왕버들에 다가갔다. 왕버들의 몸이 보였다. 껍질은 낡은 치마를 두른 듯 겹겹이 주름져 있었고, 주름 사이에는 검은 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빛이 닿는 곳은 회갈색과 은빛이 섞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젖은 흙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몸통에는 여러 번 찢기고 아문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찢긴 자리는 거칠었다.
바람과 비에 드러난 속살은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울컥해지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그 빈 공간이 이상하게도 차갑지 않았다.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이 머물다 간 자리였다.
안쪽에는 빛이 닿지 않아 어둡게 그을린 면이 있었고, 그 위로 세월이 만들어 낸 굴곡들이 남아 있었다. 마치 물이 지나간 바위처럼. 빈 공간의 바닥에는 부서진 나무 조각 몇 개와 마른 잎들이 가지런히 들어앉아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놓아둔 이불처럼.
나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나무의 속을 지나갈 때, 왕버들은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후우— 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오래된 집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것은 나무가 세월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는 소리였다.
나무가 세월을 호흡하는 소리 속에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있었다. 속이 빈 나무에는 늘 이야기가 살았다. 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여우가 몸을 숨기고, 길을 잃은 아이가 잠시 들어가 울음을 삼키던 곳. 환상과 상상의 세계였다.
왕버들의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뻗어 있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꺾인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온 것들이 가진 '자세'였다. 억지로 곧게 서지 않는 세월의 무게.
빼빼 마른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가지 끝에는 아주 작은 눈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그 눈들은 또 다른 시간을 기다리며 약속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텅 빈 속은 누군가를 숨기기보다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비워진 것 같았다. 세월이 너무 많이 들고 나가서, 마침내 ‘비움’이라는 방이 생긴 것처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무는 부러지지 않기 위해 속을 내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비어 있음은 약함이 아니라, 오래 버티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사람도 그렇다. 꽉 채운 마음이 어느 날 깨지면 무너지고, 비워진 마음은 바람이 통과해도 버틴다. 바람이 지나갈 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뒤돌아 산책길을 천천히 걸었다. 몇 걸음 가다 다시 돌아보았다. 왕버들은 여전히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든든했다. 기대어도 괜찮다고, 비어도 괜찮다고, 오래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오래오래,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왕버들이 나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한 번 더 나무의 속을 지나가며, 왕버들이 나직이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비워져서,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