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던 겨울

나와 왕버들

by 담서제미

눈이 너무 많이 왔던 날 (내 시점)


그날은 눈이 너무 많이 왔다. 산책로 입구부터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었다. 발자국이 금세 지워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얼굴을 때렸다.


이런 날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나 역시 잠시 망설였다. '나갈까 말까' 그 고민은 잠시였다. '나가지 말자'라는 마음보다 '나가자'라는 의지가 훨씬 컸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못하게 온 몸을 꽁꽁 싸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이런 날일수록 왕버들이 더 신경 쓰였다.


왕버들 쪽으로 가는 길은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자갈길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들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 끝에서 눈덩이가 떨어져, 조용한 소리를 냈다. 툭. 툭. 마치 누군가 멀리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왕버들이 보이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세 개의 지팡이 위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붉은 쇠기둥은 하얀 눈 속에서 더 선명해 보였다. 나무의 가지들은 눈을 머금은 채, 평소보다 더 기울어 있었다. 마치 몸 전체에 이불을 덮고, 조금 더 깊이 잠든 사람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이면, 지팡이가 버텨 줄까. 혹시 오늘 밤 더 많이 내리면, 아침에는 나무가 더 기울어 있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왕버들은 실제보다 더 작고, 더 멀어 보였다. 화면 속에서는 나무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넣고, 눈을 털어내며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지팡이 하나를 손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차갑고 단단했다. 눈 때문에 미끄러웠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이상하게도, 나무가 아니라 내가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왕버들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내 발자국은 점점 사라졌다. 마치 내가 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왕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겨울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존재.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지 않을까. 아무도 찾지 않는 계절,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날들.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면, 누구도 대신 서 줄 수 없는 순간들.


나는 나무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늘도 왔어.”


나무는 나에게 대답아리도 하는 듯 가지 위의 눈을 한 번 털어냈다. 눈이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 밤을 혼자 건넜다(왕버들시점)


그날은 눈이 무거웠다. 눈은 늘 조용히 오지만, 무게는 다르다. 어떤 눈은 가볍고, 어떤 눈은 뼈처럼 아프다. 그날의 눈은 오래 쌓이는 눈이었다. 가지마다 무게가 걸렸고, 나는 조금 더 기울어졌다.


나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날들을 잘 안다. 사람은 날씨에 약하다. 바람과 눈과 비 앞에서는 쉽게 발길을 접는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혼자인 시간은 두렵지 않다. 다만,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더 또렷하게 느끼게 할 뿐이다.


눈이 쌓이자, 지팡이에 힘이 더 들어갔다. 쇠는 차가워졌고, 고무는 더 단단해졌다. 나는 그 단단함에 몸을 맡겼다. 예전 같으면, 내 몸 하나로 버텼을 바람과 무게였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혼자 서는 법보다, 쓰러지지 않는 법을 더 오래 연습했다.


밤이 되자, 바람이 더 거세졌다. 가지 몇 개에서 눈이 떨어졌고, 나는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예전 같으면 버텼을 흔들림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는 속이 비어 있고, 그 비어 있음 덕분에 바람은 통과하지만, 무게는 더 크게 느껴진다.


나는 지팡이에 더 깊이 몸을 맡겼다. 지팡이는 사람이 나에게 베푼 선의였다. 나는 기꺼이 거기에 내 몸을 의지했다. 오래 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으리나 여겼다. 한 여름 더위를 머리에 등에 지고 있을 때, 여우비처럼 내리는 비에도, 엄동설한 찬 바람이 불 때면 사람들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그런데 찬바람이 살을 에이고 눈이 휘날리는 데 사람이 왔다. 눈 속에서 혼자, 천천히 다가오는 기척. 나는 그 발걸음을 안다. 늘 멈췄다가, 다시 한 걸음씩 내 곁으로 오는 사람. 그녀는 내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말없이 나를 보고, 내 무게를 자기 마음에 옮겨 담았다.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추워서 어떡해."

"어머, 여기는 아직도 푸른 잎이 남아 있어."

그녀는 나를 나무가 아니라 사람처럼 대했다. 그녀는 다정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말보다 침묵을 더 잘 듣는 존재라는 걸, 나는 오래전에 배웠다. 눈은 내렸고, 바람은 계속 불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해 주었다.


“걱정 마. 나는 나를 지탱하는 법을 잘 알고 있어. 이제부터 어쩌면 나도 너를 기다릴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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