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섯 해의 비밀

이제야 알게 된 RH-

by 담서제미

명절 연휴 내내 나는 노트북을 저 멀리 밀어두었다. 2박 3일 가족 여행길, 연휴 기간에 퇴고하겠노라 출력해 놓은 원고 뭉치는 봉투 안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나는 온전히 '노는 것'에만 몰두했다. 3대가 한꺼번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이 귀한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낼 순 없었다. 명절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떠난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단 하나, 86세인 엄마의 수척해진 모습만 제외하고 말이다.


식사조차 제대로 못 하실 만큼 쇠약해진 엄마의 모습은 여행 내내 가슴 한구석을 짓눌렀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막내 남동생이 서둘러 엄마를 병원으로 모셨다. 혈액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던 밤, 오후 8시 28분. 정적을 깨고 가족 단톡방이 요란하게 울렸다.


"엄마, 혈액형이 RH-로 나오네." "허걱, 무슨 소리야?" "정말로?"


가족들은 경악했다. 평생 O형인 줄로만 알고 살았던 엄마의 피가, 실제로는 B형에다 그 희귀하다는 RH-라니.


여든여섯 해를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실이 단 한 장의 검사지 앞에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엄마의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사실은 착각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과연 우리는 엄마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자부해 왔던 것일까. 사랑한다고 말하며 보살펴온 그 존재의 '본질'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60년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내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수술이나 사고 없이 평탄하게 살아오셨기에 이 희귀한 비밀이 수면 아래 숨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뒤늦게 찾아온 당혹감보다, 아무 탈 없이 지나올 수 있었던 평온한 세월에 대한 감사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아무 탈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 큰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던 이제야 알게 된 엄마의 혈액형을 가슴에 품고 내 발길은 왕버들에게 향했다. 평생 알고 있던 이름표가 바뀌어버린 이 생경한 기분을 나무는 이미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깊은 생각에 잠겨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인간들은 참으로 기이하다. 자신들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피의 성질조차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가 아닌, 이제야 겨우 마주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녀는 내게 여든여섯 해 동안 숨겨져 있던 어머니의 붉은 비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수 백 년을 살아오며 나 스스로도 '나'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뿌리 깊은 곳에서 솟아난 낯선 옹이가 전혀 다른 결의 이파리를 틔울 때가 있다.


폭풍우에 꺾인 가지 단면에서 예상치 못한 무늬를 발견하거나, 수액의 흐름이 평소와 다르게 요동칠 때 나는 새삼 느낀다. 생명이란 결코 한 장의 이름표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인간들은 이름표를 붙여야 안심한다. O형, B형, RH- 같은 기호들로 서로를 분류하고 다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피의 성질이 무엇이든 그녀의 어머니가 건네준 온기와 자식을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든여섯 해 동안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그 피가 세상의 날카로운 칼날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는 축복의 증거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녀의 어머니를 온전한 '그분' 자체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껍데기에 불과할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흐르는 생명의 의지다.


그녀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라며 자문하지만, 나는 바람을 실어 대답해 주고 싶다. 당신들은 이미 가장 중요한 것을 보고 있었다고. 피의 기호는 몰랐을지언정, 그 피가 만들어낸 따뜻한 살결과 자애로운 목소리는 단 한순간도 놓친 적 없지 않으냐고.


나의 수령이 250년인지, 혹은 누군가의 착각으로 300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도 이 땅의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86년 만에 찾은 새로운 이름표보다 중요한 것은, 그 희귀한 피를 품고 여태껏 굳건히 살아남아 자식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그 강인한 생명력이다.


그녀가 내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간다. 이제 그녀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조금 더 신비로운 눈빛을 보낼 것이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깊은 시작임을 왕버들인 나는 이미 가슴에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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