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눈

by 담서제미

서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기차역 대합실은 평일 오후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핸드폰 화면 속으로 침잠한 사람, 한 손에 일회용 커피잔을 들고 식어가는 온기를 음미하는 사람, 둘씩 셋씩 모여 낮은 웃음 섞인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까지. 대합실은 마치 거대한 정거장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흐르는 하나의 작은 도시 같았다.


어디론가 떠나는 이의 뒷모습에는 설렘의 미동이 있고, 돌아오는 이의 어깨에는 익숙한 안도감이 내려앉아 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매끄러운 바닥을 굴러가는 여행가방의 소음이 유난히 경쾌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쫓아 시선을 옮기다 보니, 문득 내 안에서도 낯선 갈증이 고개를 들었다. 예정된 일정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지도 지도도 없이 그저 몸을 싣고 훌쩍 떠나고 싶다는 철없는 충동.


독일의 문호 괴테는 말했다. “사람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라고. 그 문장을 입안에서 가만히 굴려 보았다. 기차역에 모인 저 수많은 사람 중 진정으로 떠나기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결국 돌아갈 곳이 있기에 기꺼이 낯선 곳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번잡한 빌딩 숲 사이에서 보낸 시간은 나를 소모시키는 듯했다. 빽빽한 지하철 노선도처럼 얽힌 관계들과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정들.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닳아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떠나와 보니 내가 두고 온 것들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식탁 위에 놓아둔 읽다 만 책, 매일 아침 창가에 머물던 햇살의 각도,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왕버들의 묵직한 그림자까지.


여행가방을 끌고 입구나 출구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떠남의 진짜 의미를 곱씹었다. 떠남은 익숙한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다시 사랑하기 위한 우회로다. 내가 타야 할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나는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접어 기차표와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나는 '떠남'이 아닌 '돌아감'의 열차에 몸을 싣는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 나의 뿌리가 닿아 있는 그 고요한 쉼터로 향하는 길은 떠날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오늘 그녀는 기차 냄새와 먼 곳의 바람을 옷자락에 묻힌 채 돌아왔다. 그녀가 내 곁에 서자마자 느껴지는 기운은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차분했다. 멀리 다녀온 자만이 풍기는 특유의 서늘하고도 맑은 향기였다. 그녀는 기차역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람과, 그들이 끌고 다니던 여행가방의 소리에 대해 내게 들려주었다.


나 같은 나무에게 '떠남'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곳에 뿌리를 내린 이후로 단 한 뼘도 자리를 옮겨본 적이 없다. 인간들이 기차를 타고 팔도를 유람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동안, 나는 오직 수직으로만 길을 냈고, 깊이로만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 역시 매일 떠나고 있다는 것을. 내 잎사귀들은 바람을 타고 먼 마을까지 소식을 전하러 떠나고, 내 향기는 산맥을 넘어 이름 모를 골짜기까지 흘러간다. 무엇보다, 내 안의 수액은 매일같이 뿌리 끝에서 가지 끝까지 먼 여행을 반복한다.


그녀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음을 안다. 생텍쥐페리는 그의 글에서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서울의 번잡함을 뚫고 다시 내 앞에 섰을 때, 그녀의 눈은 이전보다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눈, 그것이 바로 떠남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나무인 나는 제자리에 서서 세상을 배운다. 계절이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보며, 영원히 머무는 것은 없음을 알았다. 떠남이 화려한 꽃치장이라면, 돌아옴은 단단한 알뿌리와 같다. 그녀가 기차역에서 느꼈던 그 막연한 갈망은 사실 제자리에서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를 잠시 덜어내고 싶다는 신호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다시 일상의 자리에 앉아 글을 쓸 것이다. 하지만 기차역 대합실에서 마주했던 그 수많은 뒷모습과 드르륵거리던 가방 소리는 그녀의 문장 사이사이에 숨어들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리라. 떠나본 자만이 돌아온 자리의 소중함을 알고, 흔들려본 나무만이 고요의 가치를 아는 법이다.


그녀가 내 등걸을 가만히 짚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손길이 따뜻하다. 나는 가지를 흔들어 그녀가 묻혀온 먼 도시의 소음들을 털어주었다. 이제 다시, 이곳에서의 시간이 깊어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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