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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Sep 30. 2024

무조건 하자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면 된다.

"언니, 해금 공연일정이 잡혔어요"


"엥, 무슨 공연, 우리도 해야 돼"


한 달 보름을 결석했는데, 공연이라니.


유럽 여행과 불가피한 사정으로 한 달 보름간 해금 수업을 갈 수 없었다. 


올 3월 해금 수업을 같이 시작한 수강생은 총 6명이었다.  


지금까지 남은 사람은 3명이다.  



해금이 나에게로 오던 날


2007년 가을 와온해변. 


정확한 날짜는 잊어버렸지만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갯벌에 펼쳐진 저녁노을이 낮과 밤의 경계에서 장엄한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그건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빛,  주황과 노랑이 섞인 찬란한 황금빛, 옅은 분홍빛, 은은한 보랏빛, 파스텔 빛이 서쪽 하늘에서 시시각각 장엄한 파노라마를 만들고 있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도 사라져 버린,  삶의 마지막을 아낌없이 태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와온해변 저녁노을에 취해 꿈인 지 생시인 지 그것조차도 애매하게 느껴질 즈음,  흐느끼듯 애절하면서도 아련한 악기소리가 들렸다.  


사라져 가는 저녁노을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음은 신비로웠다.  


그날 만난 음악은 정수년이 연주한 해금곡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였다. 


반드시 해금을 배워서 꼭 '이 곡을 연주할 거야'라는 결심을 하고 바로  다음 날 해금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가르쳐 주는 곳이 많지 않았다. 겨우 찾아서 한 달 정도 다녔는데 그곳이 문을 닫았다. 


해금은  바른 소리와 음색을 내려면 수개월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연습을 거듭해야 겨우 음이 나올까 말까 한데 한 달 배운 내 해금소리는 삑, 삐이익, 말 그대로 소음일 뿐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한 달이나마 배운 것을 토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했으나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실력은 연습과 비례한다고 주중에는 일에 치여서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 하다 보면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악기점에 가서 주말에 레슨을 해 줄 만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토요일 오전에 1시간씩 레슨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 기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주말에는 주중에 하지 못했던 집안 일과 가족행사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결국 레슨은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그렇게 해금은 거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잊어버릴 만하면 '고향의 봄' '섬집아기' '에델바이스'를 비롯한 연습하기 쉬운 곡들만 연주하곤 했다.

그 정도라도 내 곁에 있었던 해금은 지방 발령이 나면서 멀어졌다.  


그동안 기타, 우쿨렐레, 미니하프, 칼림바의 문을 두드리는 악기 유목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싫증이 났다. 


우연히라도 해금연주곡을 듣게 되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퇴직하면 꼭 해금을 '제대로 배워보리라' 그건 염원이었다.


 

노력이 부족한 거지, 악기 탓이 아니라고


퇴직 후 바로 국악 전수관에 등록을 했다. 그것이 올해 3월이었다.  


몇 년 동안 거실 귀퉁이에 있던 해금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케이스는 군데군데 낡아서 헤어졌다. 조율을 한다고 하는데도 음이 흔들렸다.


국악원에 있는 새 해금과 수강생들의 악기소리는 어찌나 청아한 지.  '내 해금소리가 삑삑 거리는 건 해금이 오래돼서 그래'라며 모든 걸 해금 탓으로 돌렸다.


"해금을 바꿔야겠어"라고 하자 나를 언니라 부르는 동기는


"전공을 할 것도 아니고 취미로 할 거면서 굳이 또 새로 살 필요가 있어요. 일단 수리해서 해 보고 정 안되면 사요"라고 했다.  


강사에게 부탁을 해서 수리를 맡겼다. 


"만약에 수리를 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더 낫겠다 싶으면 살게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1주일이 지난 후 나에게 다시 온 해금은 그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청명한 소리가 났다.


"악기장님이 어지간해서 소리가 좋다는 말을 잘 안 하시는데 두 번이나 좋다고 하셨어요" 라며 원산만 바꿨다고 했다.


음을 맞추고 강사가 연주를 하는데 '세상에, 저게 내 악기가 맞아.' 내가 연주할 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나왔다.


뭐든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는데 연습을 게을리해 놓고 소리가 나지 않으니 악기 탓을 한 거다.



무조건 하자


공연을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잠깐 망설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동안 멋지게 연주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지, 연습도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고는 악기 탓만 했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하자, 공연을 준비하려면 연습을 할 수밖에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해보자'라며 마음을 먹으니 용기가 생겼다.  


"어려워서 못하겠어요"


"아직은 실력이 안 돼요" 라며 포기를 한 사람 빼고


초급반에서는 무조건 하자를 외치는 2명만 무대에 서기로 했다.


이제 공연일정은 정해졌고 후퇴는 없다.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다.  


같이 공연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잘할 때까지 연습에 연습, 피나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악기가 오래돼서, 해금 자체가 줄이 둘이라 음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 너무 어려워요.' 이건 다 핑계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잘하기를 바랐으니, 이보다 더 고약한 심보가 어디 있는가?


 어렵고 힘들어서 못하는 건 없다. 단지 했을 뿐. 어떤 것도 노력 없이 얻어지는 건 세상에 하나도 없다.  


피와 땀을 흘린 노력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는데,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 이 보다 더 신바람 나는 것이 어디 있으랴.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고

오늘보다 내일 더 해금소리가 나아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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