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활의학과 환자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피아노 학원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였다. 바이올린 연주를 업으로 하셨던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은 덕인지, 나는 피아노 연주에 꽤나 소질이 있었다. 성격도 끈기 있는 편인지라 선생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기초 스케일 연습(체르니니, 하농이니 하는...)도 지루해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였고, 초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쉬운 곡은 더듬더듬 어느 정도 연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내 부모님께서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취미활동이 중요하다고 일찍이 생각하셨고, 그에 따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예체능 학원들을 몇 군데 다니고는 하였다. 피아노 학원뿐만 아니라 유치원 때 잠깐 미술 학원에 다니기도 했고, 운동 쪽으로도 태권도와 검도 학원에 다니기도 하였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 친구들끼리 연합하여 축구나 농구를 배우는 소그룹이 구성되어 활동하기도 하였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중 내가 가장 꾸준히 즐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피아노와 테니스일 것이다. 다른 것들은 학원에 있을 때가 아니면 다시 할 기회가 딱히 없었다. 피아노 연주는 경우가 달랐는데, 10살 때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집에 피아노를 한 대 새로 들이게 되었고, 그 시기는 마침 내가 몇 개의 피아노 곡을 좀 들어줄 만하게 치기 시작했던 때와 맞물렸기 때문에 나는 학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피아노 연주를 즐겨하게 되었다.
피아노 연주는 그렇게 정말 오랜 기간 동안 한 셈이다. 초등학교 1학년~6학년 때까지 학원을 다녔고, 중학교~고등학교 시절까지도 남는 시간에 피아노 연주를 꼭 하고는 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3,4학년 부 피아노 대회에 나가서 4학년 형누나들에 밀리는 바람에 입상을 하지 못하고 풀이 죽었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나간 대회에서는 무려 교육감상을 받고 수상기념으로 추후 연주회에 참석한 적도 있다. 그 이후로는 더 대회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급별 합창대회가 있을 때에 반주자 역할을 도맡아 하고는 했고,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항상 나에 대한 이미지 중 하나는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였다.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웠다.
그랬던 피아노가 내 일상에서 잊히는 데에는 5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의대 입학 후 의예과 1&2학년, 그리고 본과 1학년 때까지는 밴드부 활동도 하고 동아리 합창 반주도 하는 핑계로 피아노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그러다 본과 2학년 때부터는 조금 더 공부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졸업 후 병원에 취직하면서 주말 이틀을 다 쉬는 것은 고사하고 평일에도 하루이틀 이상은 당직 근무에 시달리게 되면서 피아노라는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한 것 같다. 가끔 생각날 때 5분 10분 정도 건반을 두들겨본 것을 빼면 정말로 5년 가까이 피아노를 전혀 연주하지 않은 것 같다.
요즘은 이전보다 시간이 좀 남아서 나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책도 많이 읽고, 나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방의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손을 데질 않으니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는 건반을 보며, 몇 년 동안 조율 한 번 못 받아보았을 가엾은 피아노에 대해 미안함(?)과, 그러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도 15년 가까이를 열심히 해 왔고, 좋아했고, 또 잘했던 것인데, 5년을 손 놓고 있다 보니 이제 남들 앞에서 자신 있게 바로 연주할 만한 곡이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도 많이 굳어버렸을 것은 보나 마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올해는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많이 갖기로 한 만큼, 피아노를 다시 쳐보자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시작한 만큼 기본기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 생각되어 웬만하면 하농으로 스케일 연습을 먼저 한 후에 곡 연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예전에는 하도 자주 치다 보니 별생각 없이 바로 곡 연주를 시작하곤 했지만(물론 전문적인 피아니스트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너무 오래 쉬어 버린 내 손가락이 내 뜻대로 움직여질 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케일 연습을 할 때부터 손이 뻣뻣한 게 느껴진다. 그나마 오른손은 좀 나은데, 왼손은 80 bpm 정도로 속도를 유지하더라도 5분 정도만 연습하면 팔뚝에 힘이 스멀스멀 들어가기 시작한다. 힘이 들어가면 팔이 아프고 둔해지면서 깨끗한 소리는 만들어낼 수 없고 빠른 곡은 엄두도 못 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어찌어찌 스케일 연습을 끝내고서는 본격적으로 곡을 하나 잡아서 연습을 하는데, 가장 먼저 연습하기로 결정한 곡은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이다. 선택한 이유에 별다른 것은 없고, 익숙한 곡이기 때문에 고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연습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꽤 어려운 곡이다. 변주곡인 만큼 여러 가지 리듬을 연습해야 하고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의 움직임도 많으며 기교도 섞여 있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에 있어 웬만한 스케일은 다 다루게 되는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만큼 애로사항도 많다. 예전에 비해 손과 팔의 피로가 더 빨리 찾아오고, 특히 왼손의 움직임이 금방 둔해지는 것이 너무 힘들다. 손가락이 여유 있게 원하는 음을 맑게 탕탕 때려주는 느낌이 아니라, 양손 한가득 짐을 들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무거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걸음걸이는 속도도 고르지 못하고 발을 내딛는 힘도 걸음마다 다른 것이다. 요즘 피아노를 치는 내 손가락이 금방 그런 느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연습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을 한 가지 고르자면,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전에는 잘만 되었는데 왜 안 되지?" 예전에는 이 정도의 반복 연습을 하면 그 멜로디는 금세 손에 익게 되었고, 어느 정도 간격의 건반들쯤은 쉽고 정확하게 도약할 수 있었으며, 초견도 나쁘지 않아 쉬운 악보는 처음 보고도 금방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예전 일이다. 터무니없는 구간에서 미스터치(miss touch)가 나오는 순간에는 울컥 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 손가락을 탓해 보기도 하고, 더 집중하라고 자신을 다그치기도 하며, 다음번에 칠 때는 이 구간을 특히 조심해야지 다짐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은 알고 있다. 꾸준히 반복 훈련을 하는 것이다.
재활의학과 환자들도 이런 심정을 갖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다. 내가 요즘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도 '다시 시작하는 것의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기능상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별생각 없이 수행했던 동작들이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집중해도 빗나가는 경험. 이전처럼 걸을 수 없고 이전처럼 젓가락질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이전처럼 말을 할 수도 없는 경우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인데, 이는 환자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장애가 아닌 고작(?) 피아노 연주와 씨름하고 있는 나조차도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다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안함은 충분히 느낄 법한 것이다. "예전처럼 걷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대로 말을 못 하지는 않을까? 예전처럼 손을 쓰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불안 또는 두려움을 많은 이들이 느꼈을 것 같다.
다시 피아노로 돌아와 보자면, 다행스럽게도 muscle memory가 남아 있어서인지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는 과정은, 내가 아주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간단한 곡은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는 상태에는 있는 것 같다. 단지 예전만큼 좋은 소리를 못 내고 예전에 구사했던 고급 기교들을 쉽게 구사하지는 못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기에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해 댔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그만하면 피아노 웬만큼 치는구먼!" 할 만한 실력이라고는 스스로 인정하겠다. 지금 내가 피아노를 대하는 자세는 이렇다. "나는 피아노를 업으로 할 사람도 아니고, 내가 한동안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한 것은 불가피한 나의 직업적인 상황 때문이었으므로, 이렇게라도 피아노를 다시 연주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또 감사하게도, 이전에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있기에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구나, 앞으로는 이렇게 피아노를 적당히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손가락을 종종 움직여 봐야지"
재활의학과 환자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다. 안타깝게도 손상 범위가 너무 크거나 그 정도가 심한 경우는 내원 당시부터 회복이 미미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 뇌 어딘가에는 예전에 하던 활동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처한 환경에 따라 뇌의 신경회로가 변화하는 '뇌가소성' 덕분에, 내가 피아노를 다시 연습함으로써 점차 다시 익숙해지고 있는 것처럼, 재활치료 중인 환자들도 이전의 일상생활을 다시 연습하면 그와 관련된 신경회로가 다시 활성화되고, 그 주변의 신경세포들도 그 신경회로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게 된다. 다만 완전히 회복할지는 불투명하다. 예후가 명백히 좋아 보이는 경우는 "조금만 더 하면 이전처럼 생활하시겠네요"하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계에 의존해서 다소 불확실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목표는 어찌 됐든 최고의 회복을 이루는 것이다. 최고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정시기에 꾸준히 반복 훈련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동기 부여가 중요할 것 같은데, 내가 피아노에 관하여 느낀 점을 비슷하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다. 걷는 것이 힘들어진 환자에게, 비록 지금 예전에는 당연했던 동작들이 어색한 상태이고,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예전처럼 걷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불안함을 느끼겠지만, 지금 연습하는 것은 분명 이전에 했던 동작들이기 때문에 꾸준히 연습한다면 걱정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회복에 이를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게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100% 회복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와 동의를 얻어내야 하는데, 이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