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과 딸의 꿈
나는 어렸을 때 늘 공책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소녀였다. 내가 기억하는 유치원 시절부터 나는 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난 항상 공책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때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내가 그림을 그리면 친구들이 몰려와서 내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그때는 회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만화처럼 이쁜 캐릭터를 그리며 말풍선을 넣어 재미있게 그리니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 나의 보물도 내가 그림을 그린 공책이었다. 내 책상에 그림 그린 공책이 샇여만 갔다. 그러다 보니 가끔 미술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는데 그림을 잘 그려서 라기보다 창의적이고 다른 아이들과는 시점이 조금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집 앞에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다녔던 미술학원은 입시 미술학원이었나 보다. 내 기억으로는 테이블 위에 사과를 한없이 그렸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달 다니다가 그만 다녔다. 내가 좋아했던 미술은 이런 것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 후로 그림을 그린 기억이 없다. 언제 그림을 그렸냐는 듯이 그림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안타깝게도 친구 중에도 그림 그리던 친구가 없었고 단 한 명도 미대 나온 친구 없이, 나는 그림과는 거리가 먼 삶을 20년 넘게 살았다.
내 인생이 미술이, 그림이 다시 들어온 것은 온세계가 코로나로 멈추었던 2020년의 일이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면서 온종일 집에만 있게 되었다. 하루종일 아이들이랑 집에 있기 무료해서 태블릿을 사서 끄적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워낙 그림 그리기 좋아하던 딸을 따라 나도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림 그릴 때 내 심장이 뛴다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처음으로 디지털 드로잉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이모티콘 만드는 수업을 듣게 되어 취미 생활을 넘어 작게 나만 수익을 내게 되었다. 이모티콘을 시작으로 일러스트, 그리고 그림책 작가로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 성장에만 집중하며 살았다. 엄마인 내가 성장하며 열심히 사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면, 아이들도 나처럼 삶을 대하지 않을까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을 사느라 바빠서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옆에서 고사리 손으로 뽀로로나 그리던 작았던 딸이 갑자기 예중을 가고 싶다고 선언했다.
조카가 작년에 무용으로 예중을 가게 되었는데, 어른들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듣던 딸이 예중의 존재를 알게 되었나 보다. 나는 살면서 예중 다니던 친구도 없고 우리 아이들이 예중을 갈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1도 없던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중을 가고 싶다는 딸의 말을 듣고 내 마음에 ‘쿵’하고 큰 돌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주워들은 바로는 예술을 시키려면 집안의 기둥 하나 뽑힌다고 하던데… 엄마의 라이딩이 필수라던데… 이러한 카더라 통신은 나에게 마음의 짐으로 다가왔다.
마흔 살이 넘은 이 어미도 어미 인생 사느라 바쁜데…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딸이 예중을 간다고 하면 일단 학비도 1년에 천만 원 이상이 필요하고, 그 예중을 가기 전에도 학원비가 한 달에 몇백이 든다는데. 다들 어떻게 보내는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반 회사원 외벌이로는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 뻔하다. 학원을 데려다주느라 라이딩을 해야 할 것이고 아이의 학원 일정에 내 일정을 맞춰야 할 일도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생각부터 먼저 난 나는 정말 나쁜 엄마일까? 처음에 나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내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다른 엄마들은 자식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목숨이라도 다 바쳐서 지원해 준다는데, 나는 왜 해보지도 않고 부정적인 생각만 했던 것인지. 그림 그리기 좋아했던 나도 우리 엄마가 미술 학원을 보내줬었는데 말이다. 나는 왜 시작도 해 보지 않고 그러한 나쁜 마음부터 생겼던 것일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루지 못한 미대생의 꿈을 내 딸이 이루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얄팍한 엄마의 검은 속내가 드러나기도 했다. 가끔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또는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게 하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그런 검은 속내를 가진 부모가 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앞서면서도, 내가 가보지 못한 예중 예고의 길, 미대의 꿈을 꿀 수 있는 딸이 부러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물론 응원 가지고는 부족하다. 경제적 지원이 필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미루고 미루던 딸이 원하던 입시 미술학원을 다닌 지 이제 한 달이 되어 간다.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대치동을 일주일에 두 번 라이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편도 30분의 라이딩을 하면서 차 안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해서 보내야 하나… 예중 예고 가면 뭐가 달라지나. 미대는 정말 갈 수 있는 것일까. 미대 나와서 뭐 먹고사나… 참 간사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 마흔에 다시 미대를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나였는데, 딸이 간다고 하니 뭐 이리 걱정부터 앞서는지 말이다.
경험해 본 것과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의 차이에 대해 항상 설파하던 나인데. 딸도 해보고 안 되면 실패라는 좋은 경험을 한 것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야 해서 자꾸 망설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지금은 딸이 전혀 힘든 내색 없이 즐겁게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했다면 어쩌면 나처럼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림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이 마흔에 돌고 돌아 결국 다시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이쪽 일을 조금이나마 발을 담가보니, 미대 졸업장이 있는 것이 부럽긴 했다. 딸도 딸 인생이니 앞으로 수많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겠지만, 일단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렇게 노력한다면 아낌없이 지원해줘야 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중간에 포기한다면, 살짝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것은 안 비밀)
아직도 마음을 정한 딸보다 엄마인 내가 두렵다. 과연 아이의 뒷바라지를 잘 해낼 수 있을지. 그리고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는 있을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지원을 해줘야 하는지. 아직은 막막하다. 그러나 불안할수록 나는 딸을 더 바라본다. 딸은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있다. 어미인 내가 더 나약한 인간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일수록 내 옆에서 고사리 손으로 그림을 그리던 내 딸을 꼭 안아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