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 밖을 나가야하는 이유
나는 MBTI가 E이다. 지금은 극 I인 남편과 살다 보니, 극 E에서 I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하지만 본성은 E이다. 워낙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주변에 친구와 지인이 많다 보니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약속을 잡아서 집을 나가는 것을 보고, 친정 엄마는 “넌 참 늙어도 여전하구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혼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가족과 함께 나가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즉, 가족끼리 어딜 많이 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쁜 엄마인가…?)
이런 E성향인 내가 11월부터 집에서 재택으로 통역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단 기본적으로 재택을 해야 한다. 그 사이에 보통 1시간짜리 회의가 3건 정도 있다. 예를 들어, 아침 10시부터 1시, 2시부터 3시, 4시부터 5시. 이렇게 평균 하루에 3건의 회의가 있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다른 요일에 비해 통역이 적어서, 1,2건 있는 정도이다. 남편이 나의 근무 형태를 보더니, 엄청 꿀이라고 놀려댄다.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스케줄이 전날 저녁에 나온다는 것이 함정이다. 그래서 나의 회의시간이 언제인지 전날 알 수 있기에, 약속을 잡는 것이 힘들다. 그리고 중간에 시간이 비더라도, 가끔 긴급건으로 회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그래서 밖에 있다가 갑자기 회의 요청이 오면 거절을 하면 안 된다. 이러한 이유로 가능한 한 10시에서 7시엔 집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근무 시간은 하루에 길어봤자 3,4시간에 비해 많은 월급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통역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그렇다. 1시간 동안 얼마나 초 긴장을 하고 통역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업무 강도가 보통 회사원의 하루의 강도와 합치면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매일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 일을 한 지 2달이 지났다. 지금껏 내가 이 일을 수락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이렇게 감옥과 같은 집에 갇히기 싫어서였다.
나는 나의 직업이 모두 프리랜서 개념이었다. 빨래방도 일요일 오전에만 가고, 나머지는 문제가 일어날 때 필요시에만 출근을 했다. 내가 조정 가능한 출근이었다. 그리고 통역 일도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일에 내 일정이 맞으면 수락하여 일을 했다. 그리고 일본 유학원 근무도 일주일에 고작 3번 정도 갔고 시간도 짧았다. 그 외의 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 것, 주로 그림 그리고 그림책 만드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배우고 싶은 것도 마음껏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일에도 자유롭게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다 재택근무를 하고 나서부터 나는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처음에는 좋았다. 잠옷 바람으로 화장도 하지 않고 일을 하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가지도 않으니까 밥값, 커피값 그리고 옷값도 들지 않았다. 집에서 있는 반찬에 대충 점심을 먹고, 아이들 간식과 도시락까지 챙길 수 있어서 좋았다. 진작에 이 일을 왜 수락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어떤 날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서 처음 바깥공기를 마신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우울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집에서 전날 남은 음식으로 혼자 점심을 먹는다. 회의 중간에 보통 1시간 정도 시간이 비니까,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넷플릭스를 보면서 딸의 연필을 깎는다. 내 그림을 그릴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회의가 끝나고 나면 뇌가 너무 풀가동해서 그런지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림을 그릴 마음이 싹 가신다. 평일에는 가족 외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내내 통역 회의 하고 밥 하고 도시락 싸고 연필 깎다가, 밤 10시면 따님 라이딩을 하러 가는 반복되는 일상. 그나마 운동을 매일 하려고 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하루는 성당, 하루는 빨래방 갔다 오면 금방 녹초가 된다. 사실 평일에 이렇게 열심히 일 했으면 주말에라도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나는 주말도 근무의 연장과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날 현타가 온 것 같다.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일 저녁에 (따님 라이딩 때문에 아주 드물지만) 친구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회사원처럼 누군가를 만나려면 주말에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몸은 너무나 힘들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숨이 쉬어지지 않을 것처럼 너무나 답답했다.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던 찰나에, 잠시 그만두었던 유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사실 얼마 전에 가르치던 학생이 카톡이 왔다. “선생님이 그리워요… 선생님이랑 공부하고 싶어요…”라면서 새 선생님이 공부를 조금 덜 시키는지,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워낙 뭘 해도 빡쌔게 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이들에게도 숙제를 많이 내주고 독려하는 편이었다. 아마 그 학생은 모범생이었고 의지가 강했던 친구라, 나의 스파르타식이 맞았었나 보다. 그때 중간에 그만두고 나온 것에 조금 미안함도 있었다. 그리고 학원 측에서의 나의 평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다시 학원에서 수업 제안이 들어왔다.
저녁 8시 20분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나는 마지막 한 타임만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사실 회의가 5,6시면 끝이 나고, 가끔 7시에 끝이 나는데 학원까지 30분이면 가기 때문에 마지막 수업을 받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나의 체력일 뿐. 나는 마침 답답하던 찰나에 수업을 승낙했다. 그렇게 자주 가던 강남역. 학원을 그만뒀을 때 너무 좋았다. 이 지긋지긋한 강남역, 이제 안 와서 너무 좋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강남역에 다시 출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물론 지난번에 비해 다른 점은 한 반만 맡았다는 것. 그리고 지난번에는 화목토반이었다면 이번에는 월수금반이다. 사실 토요일 아침에 학원에 온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토요일 아침에 대치동 라이딩을 하지만 말이다.) 반이 하나여서 수업 준비하는데도 수월하고, 수업도 1시간 20분만 하고 오면 되니까 마치 나에게는 마실 나가는 기분이 든다. 하루 종일 집에서 컴퓨터와 대면하여 통역하다가, 사춘기인 아들과 저녁 먹고 운동을 한다. 사람과 대화할 일 없던 나에게 학원에서의 아이들과의 시간은 마치 힐링 타임인 것이다. 심지어 강남역이라니!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강남역 아닌가!
그렇게 다시 나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남편도 처음에는 걱정하더니, 내가 화장하고 옷 차려입고 학원 갔다가 퇴근하니 이쁘다고 좋아한다. 덕분에 다시 옷장을 열어 보고 옷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화장대에 고이 잠들었던 립스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나를 보고 친정 엄마는 계속 걱정하셨다.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냐, 그렇게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냐… 물론 돈도 돈이지만 나에게는 감옥에서 나오는 나의 작은 일탈인 셈이다. 물론 각별히 건강도 신경 쓰려고 한다. 삼시세끼 잘 챙겨 먹으려고 하고 있고 운동도 매일 하고 있다. 그리고 비타민 등도 잘 챙겨 먹는다. 당연히 10시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몸은 고단하다. 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나는 어쩔 수 없는 E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집에만 있었더니 우울했던 나날들. 이제는 일주일에 3일 바람 쐬러 나갈 생각에 신이 난다. 누가 보면 도대체 직업이 몇 개인가 싶겠지만, 나란 인간은 그냥 집에 있을 수 없는 인간일 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