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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Oct 23. 2023

마흔에 듣는 엄마의 칭찬

자식은 늘 부모의 칭찬이 고프다.

“자, 손바닥 내놔.”


찰싹, 찰싹.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한 없이 다정하고 온화한 우리 엄마. 초등학교 시절 학교나 학원 시험에서 틀린 개수만큼 나의 손바닥을 자로 때리셨다. 나는 그 당시 시험 보고 들어가는 학원에 들어가 매일 같이 가서 공부를 했고 시험을 쳤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그냥 엄마가 학원을 가라고 해서 갔고 손바닥 내놓으라고 해서 내놓고 맞았다.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공부를 하라고 하시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부모의 높은 기대에 늘 못 미쳤던 나는 대학교 입학도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갔고 취업 또한 그랬다. 첫째라고 과도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나는 늘 뭘 해도 부모님 마음에 차지 않는 아이, 부족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심지어 결혼도 그랬다. 왜 이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니, 홀아버지 모실지도 모르는 고생길 훤한 결혼을 하니, 하고 싶은 일 더 하고 살아라 등등. 결혼에도 점수를 매겼더라면 아마 0점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틀린 개수대로 마음으로 매를 맞으며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결혼 후에는 부모님이 나를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 적어졌다. 연세가 드셔서일까. 아니면 결혼하고 출산하고 육아를 하니,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인정해 주셨던 것일까. 그즈음부터는 부모님이 나를 평가하거나 혼을 내시지는 않았다. 그냥 한발 물러서서 나를 관찰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사랑의 잔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듣고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육아만 하는 내 일상이 무료해서. 그리고 남편의 부동산 투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시간 동안, 매일 같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아이들이 하원하면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또 온라인강의를 듣느라 바빴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아빠에게 공부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15분 거리에 사시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부모님께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고 늘 냉정한 평가만 받아서일까. 내가 하는 일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넌 맨날 뭐 하길래 그렇게 바쁘냐.”

라고 바빠 보이는 나를 보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공부한 후 공인중개사를 붙고 나서야 나는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는 또 무슨 말을 들을까. 가슴이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 어려운 공부를 왜 했어. 대단은 하네.”

다행이다. 애는 안 키우고 그런 공부를 왜 했내며, 손바닥 내놔!라고 말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말씀은 그렇게 했지만, 나중에 친구들에게 뭘 듣고 오셨는지, ‘그 시험 엄청 어렵다며. 역시 큰딸은 머리가 좋네~’라며 작은 칭찬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살면서 처음 부모님께 칭찬을 받았다. 늘 부족한 큰딸을 챙겨주려 하시고 우리 아이들은 이뻐라 하시지만, 이상하게도 칭찬에는 인색하셨던 부모님이다. 30대 후반에 전혀 나의 본업과 상관없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는 딸의 말에 처음 칭찬하신 부모님이다. 나에게는 나름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엄마아빠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이 마흔에도 부모님의 칭찬에 고프다는 것을.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 그것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며 네이버 오지큐 스티커도 만들고 폰티콘에서 컬러링북도 만들었고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차마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지 못했다. 분명히 또 ‘통역은 안 하냐.’ ‘공인중개사는 그럼 왜 땄냐.’ 라며 또 점수를 매기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작년에 폰티콘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엄마한테 말해버린 것이다.

“할머니! 우리 엄마 전시회 나가요!”

“… 뭐? 너네 엄마가 뭘 나간다고? “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아쉽게도 아이들이 나의 커밍아웃을 해준 바람에 그동안 조금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고 아주 간단하게 말을 했다. 전시장이 친정이랑 멀지 않아서, 다 같이 보러 가기로 정해지면서 그때부터 나의 심장은 또 바운스 바운스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대동하여 나의 그림을 본 엄마의 첫마디.


“우리 딸 그림 잘 그리네~”


내 인생 두 번째 칭찬이었다. 그러면서 자꾸 그림이 팔렸냐고 물어보면서, ‘안 팔리면 엄마가 사줄게.‘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어렸을 적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한꺼번에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원망하던 그 시절의 부모님 모습. 뭐가 그렇게 부족했을까. 난 뭘 해도 안 되는 아이인데, 뭘 해야 칭찬받을 수 있을까. 그 어린 마음에 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응어리가 나이 마흔이 되도록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혀 있었다. 그리고 내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더욱 그 응어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들의 학업에 신경 쓰지 않는 엄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커밍아웃 덕분에 내가 그림을 취미로 그리신다는 것을 부모님이 아셨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얼마 전 부모님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다. 몇 년 동안 우리 집을 오신 적이 없던 부모님은, 우리 집을 보고 경악을 했다. 나는 옛날부터 정리정돈을 잘할 줄 모르는 인간, 즉 쑤셔 박기 대장이었다. 여기저기 서랍에 쑤셔 박혀 있는 물건들을 보고는 친정 부모님은 1주일에 1번 와서 딸 집 정리를 하기로, 두 분이 결정하셨다. 나는 반 강제로 매주 부모님의 지휘 아래 우리 집 대청소를 하게 되었다.


“너는 집안 꼬락서니가 이게 뭐니. 살림에도 관심을 가져야지. “

“애엄마가 이러면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겠니.”

“벌레 나오겠다 정말 쯧쯧쯧.”


그렇게 며칠을 우리 집에 와서 대청소와 정리를 하고 가신 부모님. 사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다. 70을 앞두고 있는 부모님. 엄마는 부엌을 다 치우시고 걸레로 찌든 때를 박박 닦아내신다. 아빠는 화장실의 물때는 제거한다고 손수 유튜브 영상을 보시고는 청소용품까지 가지고 오셔서 호텔 화장실처럼 닦아 놓고 가셨다. 죄송한 마음 반, 불편한 마음 반을 가지고 우리 집 대청소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어느 날.

점심을 같이 먹으며 얼마 전 내가 만들었던 키링을 엄마한테 주고 싶어서 꺼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나를 닮아서인지, 귀여운 것을 좋아하신다. 고속터미널에 가서도 이쁜 키링이 있으면 나랑 여동생 것까지 사서 주시는 분이다.


“엄마, 이거 가방에 달아요.”

“어머~ 귀엽다~ 어디서 났어?”


잠시 고민했다. 샀다고 할까, 만들었다고 할까. 에이, 이젠 될 대로 돼라!

“엄마, 내가 만들었어. 사실…이런 것도 만들어 내가.”

하면서 내가 만든 스티커와 배지, 키링, 달력 등을 다 보여드렸다.

“엄마, 내가 이런 거 하느라 바빠요. 집안일을 할 시간이 없어요. 이해해 줘요~. 하하하.”

라고 용기 내어 말했더니,

“그럼! 야, 청소는 엄마가 할게! 넌 그림 그리고 돈 많이 벌어~~ 매주 와줄 수도 있어!”


그러고는 본인 가방에 키링을 달고는 달력을 4개 가져가셨다. 그 후 매일 같이 연락 온다. ‘오늘은 달력 팔렸어?’라며 나보다 더 궁금하신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칭찬이었다. 그 칭찬은 그 어떤 칭찬보다 임팩트가 컸다. 나의 능력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총 3번의 칭찬을 부모님께 받고 나니 나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더 당당하게 내 일을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다. 지금까지 물론 나를 인정해 주었던 남편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나의 친구들과 인친들이 있었지만, 부모에게 인정받는 것이 이렇게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이번에 깨달았다. 나이 마흔에 70을 앞둔 부모님께 받은 칭찬과 인정은 마치 처음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만큼의 기쁨이었다.


지금까지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들, 물론 여전히 왜 그러셨는지 묻지는 못했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의 부모님의 행동은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내 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조금씩 더 오픈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렌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토록 공부에 기대가 컸던 부모가 죽도록 미워서, 지금 아이들에게 공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이것 또한 올바른 것은 아닌 것 같다. 균형을 잘 잡으면서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줘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겪은 아픔을 아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당연한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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