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변으로 적당한 높이의 동산이 하나 있다.
산정을 보는데 채 2시간이 걸리지 앉는 소담한 봉우리이지만, 그리하여 생각을 정리하며 오르기가 좋았다.
요 며칠 머릿속이 복잡하여 문득 가벼운 행색으로 그리 향했다. 그렇게 중턱 즈음을 지났을 때, 먼발치에서 다가오던 발소리가 한산한 산중의 고요를 깨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완연한 백발의 어르신이었다. 어르신의 얼굴엔 난처하고도 멋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초행에 출구를 잃은 산행객인가 싶었는데, 그는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그것은 당신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 보는 법을 알려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그 세대의 어르신이라면 그런 사소한 조작을 곤혹스러워하시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등산로에서 비켜서서 어르신에게 시연하며 설명을 했다. 어르신은 완연한 미안함으로 몇 차례 재차의 반복을 요청했다. 한참 어린 청년을 향하기엔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 경어와 함께, 무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몇 차례의 설명과 시연을 거듭했다. 어르신은 점차 이해가 되어간다는 듯, 심심한 추임새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때, 시연하는 손가락 너머로 몇 장의 사진이 문득 눈에 띄었다. 서울대학교 동문회 현수막이 가로 걸린 단체 사진이었다. 현수막에 쓰여 있는 학번으로 미루어, 어르신이 참가하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잠시 실례인 줄을 알면서도 사진에 얽힌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가벼운 웃음 뒤로 당신의 삶의 궤적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그는 흔히 당대 출세를 위한 성골이라고 알려진 경기고ㅡ서울대 출신에,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 행정과(오늘날의 5급 공채)에 소년 등과 한 수재였다. 관운이 있었는지 공직에서도 승승장구하여 중앙부처 실장까지 올랐고, 국비로 외국 대학에서 석사 학위까지 마치고, 퇴임 직전에는 유수의 공사 임원까지도 몇 차례 거친 소위 대단히 출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처음 마주한 젊은이를 향한 품위와 교양은 이러한 지점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대단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아니, 엄밀하게는 그 탓에 그의 말 뒤로 하염없이 감창한 기분에 사로잡혀갔다. 당대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만했던 이도, 고작 스마트폰이라는 보편적인 도구의 기본적인 기능조차 다루지 못하여 이 처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게 노화라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나이 듦이라는 것은 쇠락을 동반자로 하여 죽음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험과 사고에서 비롯된 오랜 사견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명명백백한 하나의 실증으로써 그 사견이 보강되는 것은 하릴없이 무거운 경험이었다.
말을 맺은 그 역시 곧 같은 생각에 미쳤는지, 회한에 가까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젠 키오스크(그는 주문기계라고 표현했다.) 탓에 어느 음식점에서 밥 시키는 것도 어려워서 피하는 늙은이가 되어버렸다며 스스로를 자조했다.
나는 애써 과거로써 어르신을 치켜세우고, 가르쳐 드린 것을 홀로 해내시는 것을 보고 이내 심심한 안부로 그를 배웅했다. 어르신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내게 거듭하였고 나는 그때마다 짧은 목례를 드렸다.
우리의 걸음은 거기서 교차되었다. 어르신은 하산길을 따라 멀어져 갔고, 나는 고갯마루로 향해 오르는 등산길을 마저 걸었다. 오르는 걸음과 함께, 정리되어 가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져 갔다. 산정까지 얼마간의 거리가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홀로인듯 보였고, 그것이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