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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Dec 16. 2021

떠난 이에게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초침이 잡아 끄는 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주말입니다. 날이 좋은 오전의 하늘이 풍경처럼 창 밖에 깔려 있습니다. 염치없지만, 잘 지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글을 씁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모를 어느 날의 일입니다. 그 날은 종일이 유달리 고되었고, 땅거미처럼 늘어진 착잡함을 끌고 곧장 집으로 향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타본 지 한참이던 9403번 시외버스에 올, 차창 뒤로 연신 무너지고 다시 그려지는 풍경을 따라 집까지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 문득 먼 생각만을 하던 시절을 추억하고 말았습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괜스레 창피스러웠던 시절, 활자 뒤에 숨어 울고 웃는 날이 많았던 시절. 묵은 감정들을 잉크 삼아 흐릿하게 써 내려갔던, 날숨에 마저 쉬 떠내려가 버릴 그 연약하고 하찮은 활자들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릴없이 꼬리를 물어오는 그것들을 모두 다 더듬고 나서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린 낯선 정류장 주변으론, 라져가는 가을이라는 핑곗거리에도 불구하고 단풍이 의연히 흐드러져 있었습니다. 그 가로수 길을 저는 내내 빈 걸음으로 걸어왔습니다. 간신히 마주한 현관은 도통 살갑지가 않았고, 밤 간엔 천문대를 홀로 지키는 천문학자처럼 쉬이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렇게나 많던 한숨이며 머뭇거림들이, 문장은커녕 음운조차 되지 못하고 부서져간 목소리들의 유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불면증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뒤척임 끝에 꺼본 사진첩에서, 그렇게나 익숙하던 인화지의 냄새가 더는 나지 않았습니다.


 고여버린 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들뜬 은유나 막연한 잠언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날로써 저는 어설프게나마 그 뜻을 알게 된 듯합니다. 시간이란 느리고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정주定住할 수도 있는 것임을 비로소 실감하였습니다. 제 시간은 그대로 정주한 채 우물보다도 깊게 고여 침잠해 있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어둔 수면을 비로소 마주하는 것은 롭고 슬픈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롯이 견딜 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고여버렸을 땐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때 경청하지 못했던 것이, 그 방법을 되묻지 못했던 것이 오늘에서야 퍽 후회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수시로 시간과 함께 고여버리곤 합니다. 누군가와 마주해 대화할 때면 그 사람의 입모양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동네를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으로 같이 뛰놀고 정작 폐병 환자처럼 숨을 헐떡이곤 합니다. 오랜만에 걸음 한 어느 카페에서 저는 주문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 나왔습니다. 그렇게나 익숙하고 보잘것없는 카페의 풍경이며 구조가 어쩐지 가본 적 없던 이국처럼 낯설기만 하였습니다.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제 그만큼 묵은 감정으로 활자를 새기고 있지 않음에도, 아니, 보다는 새길 수 없음에도 머나먼 여백은 홀로 남은 삶처럼 텅 빈 채로 영영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무어라 답신을 해 주긴 어려우실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며 쓰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저 쓰고 싶었고, 써야만 했습니다. 이리도 잔뜩 고여버린 시간을 어찌해야만 할지 저로선 영영 모르겠지만, 편지에 기대어 그 말을 전해준 이의 취를 더듬으면 무엇이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 음운마다, 또다시 단어마다 새삼 다르고 다르던 당신 목소리의 향취가 너무나 아득합니다. 한 단어만에 하루가 오롯이 착하게 묻어오고, 한 문장만에 며칠이 그대로 녹아 삼켜지던 당신과의 대화너무나 사무칩니다. 홀로 가 계신 그곳은 어떻습니까. 지금 밖은 이름도 모를 계절이 다시 하릴없이 지나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중언부언이 될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앞으로 몇 달은 집을 나서지 않을 작정이지만 다음 기일엔 힘들더라도 걸음을 해보겠습니다. 이만 쉬십시오. 저도 설거지를 하고 마저 살아보겠습니다.


追伸.


유난히 붉던 단풍잎 하나 따다가 책갈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다음번에 뵐 때 잊지 않고 챙겨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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