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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Mar 02. 2023

11.검은산의 여전사-열 : 그들이 사는 세상

북유럽 신화, 스카디, 뇨르드, 노아툰, 트림헤임

#. 그들이 사는 세상


 노아툰의 바닷가를 걸으며 혼자 보낸 시간은 스카디의 숨을 한결 고르게 해 주었다. 아버지의 죽음, 복수를 하기 위해 아스가르드로 달려가던 일. 발드르에게 반하고, 사랑을 알게 된 일. 남편을 얻고, 웃음을 되찾은 일. 그리고 뇨르드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 잔잔한 파도소리와 발끝에 느껴지는 모래의 가벼운 감촉은 숨 가쁘게 지나온 지난 시간과 그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을 하나씩 되돌아보게 했다.


 스카디는 행복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그와 함께 하는 포근한 일상이 생겼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이질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트림헤임이 걱정되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스카디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처음 스카디는 뇨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지금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은 뇨르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카디가 뇨르드에 대한 사랑을 키우면 키울수록, 마음속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이질감도 함께 자라났다.


 트림헤임에 있을 때, 뇨르드가 쉽게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저 잠자리가 낯선 탓이라 여겼지만, 노아툰에서 지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트림헤임과 노아툰의 환경은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전히 달랐다. 트림헤임은 춥고, 겨울이 길다. 노아툰은 따뜻하고, 여름이 길다. 스카디가 노아툰을 따뜻하다 못해 너무 덥게 느끼는 만큼, 뇨르드는 트림헤임이 시원하다 못해 너무 춥게 느꼈을 것이다. 트림헤임의 바다는 잿빛에 거칠고, 얼음이 떠다닌다. 노아툰의 바다는 에메랄드 빛에 잔잔하고, 포근하다. 트림헤임은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검은 바위산이 있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 검은 숲이 있다. 노아툰은 눈은 구경도 할 수 없고, 넓은 바다와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 스카디와 뇨르드, 로라 대리건 그림(2016. 출처 : https://www.lauradaligan-art.com/ )


 그리고 사람들. 스카디는 뇨르드와 함께 만난 트림헤임의 거인들이 떠올랐다. 뇨르드는 그들 모두에게 친절했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뇨르드에게 먼저 인사를 하거나 다가간 거인은 없었다. 스카디가 붙여준 시종들은 뇨르드의 뒤에서 그를 비난했고, 의심했다. 다른 거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뇨르드를 깔보거나 의심했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노아툰의 사람들은 스카디가 거인이라고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아이들마저도 스카디에게 다가와 같이 놀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노아툰의 사람들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이곳 사람들은 의심도 경계도 하지 않는다. 정 많고 활발하지만 너무 말이 많고 시끄럽다. 여기서는 이웃집에 밥그릇이 몇 개인지, 배갯머리 송사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까지 다 알 것 같다.


 노아툰은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이다. 노아툰은 뇨르드가 오랫동안 다스린 만큼 안정된 곳이다권력을 탐하는 일도 없다. 매일 자신의 자리에서 즐겁게 일하고, 함께 행복을 나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당장 노아툰에 쳐들어온다면.. 만일 뇨르드도 없는 상황이라면 이 사람들은 과연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노아툰의 군사력은 모르지만 사람들의 심성으로 보았을 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스카디는 가만히 멀리 수평선 위 노을을 바라보았다.


 스카디의 생각은 환경과 사람들을 지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그럼 나는 어땠을까? 지금 스카디는 뇨르드를 사랑하고, 뇨르드도 자신을 사랑한다. 이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앞으로도 가능한 걸까?  스카디는 트림헤임에서 뇨르드를 이용했다. 남편을 곁에 세워두고, 트림헤임의 유력자들과 거인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보아라! 이제 나 스카디가 트림헤임의 주인이다! 샤치의 유산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 무엇도 넘보지 말라!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곁에는 뇨르드가, 아스가르드가 있다!]


 스카디가 입 밖으로 외친 것은 아니지만, 트림헤임을 돌아다니며 외친 것과 다름없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즈음 트림헤임은 아주 분주할 것이다. 밀서가 오가고, 밀약과 음모가 난무하는 바쁜 밤을 맞이할 것이다. 트림헤임으로 돌아가면 이전보다 더 강하게 움직여야 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또 얼마나 뇨르드를 이용할 것인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지킨다는 이유로, 또 얼마나 뇨르드를 힘들게 할 것인가? 하지만 트림헤임을 버릴 수는 없다. 스카디가 자신의 자리를 버리는 순간 트림헤임은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다가 폐허가 될 것이다. 트림헤임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 스카디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고향이다.


 뇨르드가 노아툰을 떠나 트림헤임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스카디도 트림헤임을 떠나 노아툰에서 살 자신이 없다. 스카디는 노아툰의 삶의 방식이 솔직히 불편하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 웃음 뒤에 무엇이 있을까 의심했다. 심지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도 의심했다. 자신도 그들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진심이었냐고 묻는다면 스카디는 아니라는 대답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트림헤임과 노아툰. 어느 쪽이 나쁘고,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너무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르다. 언젠가 어렴풋이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스카디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지만, 뇨르드와 스카디가 사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가 사는 세상을 빼앗아도 되는 것인가? 사랑하니까 그를 나의 세상으로 끌고 와 힘들게 해도 되는 것인가? 그걸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분명히 앞으로 서로의 사랑은 더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아질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서로의 세상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사랑이 커지면 고통도 커질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 커지기보다 불평과 미움이 커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하기에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카디는 혼란스러웠다.


 오늘도 램프를 든 뇨르드가 스카디를 향해 걸어왔다. 스카디는 일어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뇨르드가 스카디를 보며 웃었다. 스카디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스카디가 노아툰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스카디는 가만히 식탁에 앉아 창밖에 환하게 떠있는 달을 보았다. 그사이 뇨르드가 포도주 단지를 하나 들고 왔다. 뇨르드가 스카디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미안하오. 오늘 낮에도 당신을 혼자 두었구려.]

[아니예요. 괜찮아요.]


스카디가 웃으며 대답했다. 뇨르드와 스카디는 한 모금씩 술잔을 기울였다. 조용하게 앉은 둘 사이로 잔잔한 파도소리가 퍼졌다. 잠시 뒤, 스카디가 이 고요한 적막을 깼다.


[뇨르드. 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 응.]


잠시 뜸을 들이던 뇨르드가 대답했다. 스카디가 뇨르드를 보며 눈을 맞추었다. 뇨르드가 스카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보아도 참 따뜻한 미소였다. 스카디도 뇨르드를 보며 미소를 지으려다 표정이 굳어졌다.


[있잖아요.. 우리..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은은한 달빛이 모래사장으로 내렸고, 바다는 잔잔한 파도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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