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튤라 : 흠.. 왠지 뇨르드가 불쌍하네요. 첫 아내와도 헤어지고, 새 아내도 그렇게.. 에구..
스노리: 뇨르드의 아내 복이 그 정도 인건지도 모르지. 나처럼.
스노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스튤라도 고개를 갸웃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는 말이 목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눌렀다.
스튤라 : .. 전 지금의 숙모님도 좋은데요.
스튤라의 말에 스노리는 조용히 웃었다. 잠시후, 스노리가 스튤라에게 물었다.
스노리 : 혹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알고 있니?
스튤라: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이 똑같을 때 하는 말아닌가요?
스튤라가 대답했다. 언젠가 스튤라의 시를 들은 마을 사람이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 마을 사람은 스튤라가 스노리의 아들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스튤라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스노리만큼 스튤라도 시를 잘 쓴다는 말이었으니까. 어쩌면 진짜로 시를 짓는 재능은 스노리의 자식들보다 조카인 스튤라 형제가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
스노리: 그렇단다. 뇨르드와는 좀 다른 경우이지만.그럼 사랑 때문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까지 버린 프레이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마.
스튤라는 두 눈을 반짝이며 스노리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 발할라의 보좌관
아스가르드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오딘의 전당인 '발할라(Valhalla : 죽은 전사들의 전당)'도 평온했다. 그런데 오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딘의 정무실에 새로운 자리가 만들어졌고, 그 자리에 젊은 신이 앉아 정무를 보았다. 신들의 귀공자,'프레이(Freyr : 주인, 군주)'였다. 당분간 평온할 것이라 판단한 오딘은 다시 세상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오딘은 이 전도유망한 젊은 신에게 기회를 주었다.
신들의 왕은 오딘이고,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알수 없으니 만일을 위한 대비가 나쁠 것은 없다. 그럴 일은 없지만, 만일 오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발드르(Baldr : 영광)'가 뒤를 이을 것이다. 발드르는 모든 면에서 오딘의 기대에 부응했다. 딱 한가지만 빼고.오딘이 보기에발드르는 너무 사람이 좋았다. 그렇기에 그런 발드르를 도와줄 젊고 뛰어난 인재가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프레이는 오딘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바나 헤임에서 온 이 젊은 신은 재치있고, 능력도 출중하다. 판단력도 좋고,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또, 전사로서의 능력도 발군에,발드르와도 친하게 지냈다. 무엇보다 오딘과 아스가르드를 향한 충성심도 가지고 있었다. '프레이라면 발드르의 충직한 오른팔이 되어줄 것이다.' 이것이 프레이에 대한 오딘의 평가였다.
오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프레이는 오딘이 맡긴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프레이가 오늘의 업무를 다 처리해가던 그때, 오딘의 신하가 프레이를 찾아왔다.
[프레이 님,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 네. 말하세요.]
오딘의 신하는 프레이의 앞으로 다가와 책상 위에 서류 하나를 올렸다.
[조금 전, 요툰헤임에 있는 정보원에게서 들어온 내용입니다.]
프레이가 서류를 살펴보니 요툰헤임의 일각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프레이의 표정을 살피며 오딘의 신하가 말했다.
[아직 세부 내용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확인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보고서도 정황과 분위기가 주된 내용이어서 이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 프레이는 해당 지역이 아스가르드를 노리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고, 거인들끼리 다툼을 벌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인들이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이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보원을 통해 추가 정보를 얻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지금 바로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 고민을 하던 프레이가 말했다.
[.. 어쩔수 없군요. 직접 확인해보는 수 밖에.]
프레이의 말에 오딘의 신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오딘의 신하와 함께 발할라의 홀로 향했다. 발할라의 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딘의 용상, '흘리드스캴프(Hliðskjalf : 높이 열린 곳)'가 있다. 흘리드스캴프에 앉으면 아홉 세계의 모든 곳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 있다. 흘리드스캴프는 오직 오딘만이 앉을 수 있다. 오딘의 허락없이 다른 신이 여기에 앉는다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지금 프레이는 오딘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하는 중이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빠른 확인이 필요하다. 프레이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흘리드스캴프에 앉았다. 물론 프레이에게 사심(私心)이나 역심(逆心)은 없다.프레이는 이것을 당연히 오딘에게 보고할 것이고, 문제가 된다면 오딘에게 처벌을 받을 것이다.
- 흘리드스캴프에 앉아있는 오딘. 칼 에밀 도플러 그림(1882. 출처 : https://bs.wikipedia.org/wiki/Odin)
프레이는 빠르게 보고서에서 언급된 지역을 살펴보았다. 보고서의 내용처럼 해당 지역에 거인들의 병력이 모이고 있었다. 이 거인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프레이는 거인들의 병력과 그들의 무장 상태, 그들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병력이 모인 주변 지역을 보다 넓게 살펴보았다. 한 지역을 건넌 곳에서 거인들의 대규모 병력이 움직였다. 그들을 살펴 본 프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의 예상대로 거인들끼리의 세력다툼일 것이다. 프레이가 오딘의 신하에게 말했다.
[그들의 목표는 다른 곳입니다. 저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이겠군요. 저들에게 뛰어난 전술가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저 상태라면 아마 결착을 내지는 못할 겁니다. 서로 간의 원한만 남겠네요.]
[다행이군요.]
오딘의 신하도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툰헤임의 정보원에게 이후의 정보를 더 모으도록 지시하세요. 저들이 결착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주변지역을 살펴보던 프레이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아니, 프레이는 말만이 아니라 숨을 쉬는 것까지 멈추었다. 그리고 프레이의 시선이 멈춘 곳에 아주 아름다운 거인족의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마치 빛으로 빚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와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의 부드럽게 뻗은 목덜미와 햐얗고 긴 팔의 움직임에 프레이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프레이는 그녀에게서 뻗어나오는 빛이 하늘과 바다를 비추는 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프레이는 그녀가 거인과 인간들 중 가장 아름다운 처녀라고 생각했다. 마치 아스가르드의 성벽에서'스카디(Skaði : 해치는 자)'가 발드르에게 그러했듯, 프레이는 이 거인족의 처녀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다.
[프레이님?.. 프레이님!]
그때, 오딘의 신하가 큰 목소리로 프레이를 불렀다. 그제서야 프레이는 정신을 찾았고,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프레이님, 괜찮으신가요?!]
프레이가 멍하게 있자, 걱정이 된 오딘의 신하가 어느새 흘리드스캴프의 앞까지 올라왔다. 프레이가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흘리드스캴프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흘리드스캴프에 앉은 자만이 볼수 있었다. 프레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런. 미안하군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아! 저들이 결착을.. 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력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좀 더 주의깊게 정보를 모아주세요.]
프레이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올바른 지시를 내렸다. 프레이는 좀 더 그녀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흘리드스캴프에 더 앉아있을 수는 없다. 프레이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오딘의 신하와 함께 정무실로 돌아왔다. 이후, 프레이는 업무를 마치고 발할라를 나왔다. 프레이는 잠시 휘청거렸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평정심도 흔들렸다. 그 사이로 아까 본 그녀의 모습이 몰려왔다. 붉은 입술과 귀밑머리 한올까지..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살아움직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프레이를 휘감으며 맴돌았다.
오딘의 허락도 없이 흘리드스캴프에 앉은 것이 문제였을까?그래서 흘리드스캴프가 화를 낸 것일까? 아니면, 그 무언가가 프레이를 이끈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을까? 그게 무엇이건 사랑이란 감정은 프레이를 완벽하게 삼켜버렸다. 프레이는 결코 자신을 휘감은 이 감정에서 벗어날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