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야기다. 오딘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요툰헤임을 여행 중이었다. 일행과는 잠시 떨어져서 혼자 요툰헤임의 한 지역을 돌아보았다. 거인처럼 변장하고, 거인들 틈에 섞여 장터를 돌아보던 오딘은 매우 아름다운 소녀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빌링(Billingr/Billung : 의미불명이나 '쌍둥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이라는 인근 지역을 다스리는 거인의 딸이었다. 그녀에게 반한 오딘은 그날부터 그녀의 뒤를 쫓으며, 그녀를 몰래 훔쳐보았다. 빌링의 딸이 물을 길러가면 갈대 사이에 숨어서, 그녀가 장터에 나오면 거인들 틈에 숨어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녀가 잠이 들면, 방 창가에서 그녀를 훔쳐보기도 했다. 오딘이 주의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여자의 육감 때문인지.. 빌링의 딸은 낯선 남자가 자신의 주위를 맴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빌링의 딸은 물가에서 친구들과 꽃을 따고 있었다. 빌링의 딸은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갈대숲 옆으로 다가가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가만히 말했다.
[아가씨를 차지하려면 몰래 밤에 와야 하는 거랍니다. 오딘, 이런 일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거 없어요.]
그러더니 꽃을 한송이 따서는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버렸다. 갈대숲에 숨어서 빌링의 딸을 훔쳐보던 오딘은 깜짝 놀랐다. 빌링의 딸이 자신을 눈치챈 데다가 정체까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오딘은 조심하고걱정해야 할 만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기뻤다.
[(아, 그녀도 이미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그럼에도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녀도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거 아닌가? 흠.. 뭐, 저렇게까지 말을 한다면야. 그 말을 들어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아무렴.)]
- 북유럽 복장을 입은 소녀. 리리야 그렉 사진(출처 : https://unsplash.com/ko/@lilissa)
오딘은 빌링의 딸이 한 말을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는 허락이라고 생각했다. 오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오딘은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를 서둘렀다. 먼저 오딘은 자신의 모습을 젊고 멋있는 모습으로 바꾸었다. 모자도 평소처럼 회색에 챙이 넓은 모자 대신 멋들어진 모자를 썼고, 옷도 편하고 가벼운 옷으로 바꾸었다. 담을 넘어야 했기에 편한 옷이 좋았고, 거추장스러운 지팡이나 무기도 챙기지 않았다. 이미 빌링의 딸이 자신을 허락했으니까. 그리고 밤이 되었다.
오딘은 달그림자를 타고, 빌링의 저택으로 향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정문 앞에 선 파수꾼을 제외하고는 경비를 서는 병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딘은 속을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빌링의 딸이 자신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경비를 서는 병사들을 치웠을 것이다. 오딘은 주변을 살피다 훌쩍 담장을 넘었다. 담장을 넘으니 넓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 주변으로는 창고 같은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데, 역시 경비를 서는 병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빌링의 딸이 자는 침실을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이어지는 담을 넘어야 했다. 오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마당을 둘러싼 건물과 창고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 안에서 수많은 거인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이내 오딘을 둘러쌌다. 마당을 둘러싸고 여기저기서 낮처럼 환하게 횃불도 밝혀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오딘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림잡아도 수십, 아니 기백명은 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창과 도끼, 검과 방패를 들고 오딘을 노려보았다.
[하아.. 어째, 웬일로 잘 풀린다 했다, 내가.]
오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매사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오딘을 둘러싼 거인들이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네 놈이 오딘이구나! 이 철천지 원수 놈!]
[감히 우리 아가씨를 넘보다니!!]
[오늘이 네 놈의 제삿날이다! 이 빌어먹을 신놈아!]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오딘은 여전히 빌링의 딸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믿었다. 저 거인들이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갈대숲에서 오딘에게 말하던 목소리는 너무도 부드럽고, 나긋나긋했으니까. 이제 오딘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 거인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당당하게 빌링의 딸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 자신을 둘러싼 거인 병사 무리를 보면서도 오딘은 기죽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좀 거추장스러운 일이 생겼다고만 생각했다. 오딘은 가만히 모자와 망토를 벗었다. 그러는 쪽이 움직이기 편했으니까.
[하아.. 니들이 말로 한다고 해서 들어 쳐 먹을 것 같지는 않고..]
오딘은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리다가 창을 들고 있는 한 거인을 향해 망토와 모자를 집어던졌다. 그렇게 마당에서 1대 17.. 아니, 1대 100(정말 100명은 아니고 많다는 의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딘은 처음에는 맨몸으로 거인들과 싸웠다. 틈을 파고들어 급소만을 노려 가격했고, 손과 발을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그렇게 몇 명인가 거인을 때려눕힌 다음부터는 거인들의 무기를 빼앗아 싸웠다. 그렇게 싸우다 부러지고 무뎌진 검과 창이 몇 개인지 셀 수가 없었다.
오딘은 전사의 신이다. 거인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오딘은 잠시 빌링의 딸을 잊었다. 오딘은 싸우면 싸울수록 왠지 더 기운이 나는 것 같이 보였다. 오딘은 이처럼 싸우는 것이 오랜만이었기에 솔직히 즐거웠다. 오딘의 주변으로 하나, 둘 거인들이 쓰러져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거인은 여전히 많았다. 거인에게 신은, 그리고 오딘은 철천지 원수였기에 거인들도 작정하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한밤 중에 시작한 싸움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저택의 마당은 쓰러진 거인들로 가득했고, 서있는 것은 오딘뿐이었다. 쓰러진 거인들의 태반은 이미 니블헤임으로 영혼이 날아가버렸다. 살아남은 거인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거인은 거의 없었다. 피투성이에 땀으로 범벅이 된 오딘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오딘의 몸에 묻은 피는 오딘의 것이 아니었다. 오딘은 그저 숨만 조금 찰뿐,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하아.. 씨! 옷이 엉망이네.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땀투성이라니.. 원.. 쯧!]
오딘은 혀를 차며 소매로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 지금 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오딘은 그냥 빌링의 딸에게 가기로 했다. 지금 모습도 나름 남성미가 풍길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