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have an idea
로키가 빌스키르니르에 도착했을 때, 토르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로키는 자신을 마중 나온 토르의 하인에게 물었다.
[어이, 토르는?]
[네, 오딘 님의 시종이 와서 모시고 갔습니다. 로키 님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오딘 님의 집무실로 오시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로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오딘이 알아버렸다. 이제는 조용히 수습하는 것은 힘들어졌다. 로키는 매의 날개옷을 갈아입고 오딘의 집무실이 있는 '발할라(Valhalla : 죽은 전사들의 전당)'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속도도 나지 않았다. 로키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오딘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로키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토르는 프레이야와 함께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토르도, 프레이야도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미 오딘에게 한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토르의 맞은편, 로키의 왼쪽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헤임달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업무로 자리를 비운 것이었지만, 어쨌건 헤임달은 아스가르드의 경비책임자다. 이번 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집무실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오딘이 앉아 있었다.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오딘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오딘의 분노와 살기가 느껴졌으니까.
[말하라.]
오딘의 목소리는 그가 내뿜는 분노와 살기에 비해 조용하고 차분했다. 로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고개를 들었다. 역시 오딘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묠니르는 검은 얼음산의 스림이 훔쳐갔습니다. 스림 만이 아는 어떤 곳에 숨겨둔 것 같긴 합니다만.. 스림은 맨입으로 돌려줄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 묠니르와의 교환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기대도 안 했다. 조건은?]
로키가 대답을 머뭇거리며 가만히 프레이야를 쳐다보았다. 프레이야가 마치 더러운 무언가를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설마.. 나예요? 그 조건이란 게..? 왜요!? 왜 또 나예요!?]
[아니.. 그건 자기가 예쁘니까..]
로키가 중얼거리자 프레이야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프레이야가 어찌나 화를 내는지, 목에 걸려있던 '브리싱가멘(Brisingamen : 불꽃의 목걸이)'이 출렁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닥쳐요! 당신한테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오딘! 저딴 말을 듣고만 있을꺼예요?!]
프레이야가 오딘에게 소리치자, 로키도 황급히 오딘을 바라보았다.
[.. 로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단 거지?]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서린 살기는 더욱 무서웠다. 로키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외쳤다.
[저.. 저도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단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고..]
[하아.. 내가 저런 작자에게 매의 날개옷까지 빌려주다니! 미쳤지!]
프레이야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렸다. 오딘이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집무실 바닥을 찍었다. '쾅! '하는 소리가 집무실을 넘어 발할라에 울려 퍼졌다. 순간 모든 이들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화를 내던 프레이야도, 토르도, 헤임달도 모두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프레이야는 내줄 수 없다. 토르! 로키! 너희가 벌인 일이니 너희가 수습하라! 지금 당장!]
오딘의 불호령에 토르도, 로키도 그대로 얼어붙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헤임달과 눈이 마주친 로키는 눈빛으로 헤임달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구했다. 난감하기는 헤임달도 마찬가지였다. 묠니르 도난사건은 온전히 헤임달이나 헤임달의 부하들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열 사람이 한 사람의 도둑을 막지 못하는 법이니까. 헤임달은 부재중이었고, 헤임달의 부하들이 아무리 물 샐 틈 없이 경비를 하고 있다고 해도 어딘가는 미흡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업무로 자리를 비웠다고는 해도 헤임달은 아스가르드의 경비책임자다. 그로 인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헤임달로서도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 오딘의 현명한 아들, 헤임달
다행히도 헤임달은 능력이 출중한 오딘의 아들들 가운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현명했다. 거인이나 인간들은 헤임달을 '반신족만큼 현명하다'고 불렀다. 지금 이 순간, 헤임달은 그런 이명(異名)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헤임달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헤임달이 고개를 들어 오딘에게 말했다.
[아버님, 저에게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습니다. 굳이 프레이야를 보내지 않고도 묠니르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오딘은 물론 토르도, 로키도, 프레이야도 모두가 놀란 눈으로 헤임달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분노를 가라앉힌 오딘이 손짓을 하자, 무릎을 꿇고 있던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헤임달이 오딘을 보며 말했다.
[우선 다른 자를 프레이야 님으로 꾸며 스림에게 보내는 겁니다.]
[가짜 신부를 보내자는 거야?]
토르가 헤임달에게 되묻자 곁에 있던 로키도 끼어들며 말했다.
[이봐, 나도 그걸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보낼 여신이 없다고! 저 미모를 대신할 여신도 없고, 가짜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스림이 가만두지 않을꺼야! 설령 발키리를 보낸다고 해도..]
[난 그런 곳에 우리 여동생들(발키리는 '오딘의 딸'이라 여겨지기도 함)을 보낼 생각이 없어.]
헤임달이 손을 들어 로키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시 로키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오딘이 입을 열었다.
[.. 조용히. 헤임달?]
[네. 다시 말하지만, 전 그런 위험한 곳에 우리 여동생들을 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여신들도 마찬가지구요. 대신 그곳에 보내도 되고, 또 보내야 하는 신을 한 명 알고 있죠. 바로 토르 형님입니다.]
[나? 내가 가라고?]
헤임달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토르를 쳐다보았다. 토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거기가 요툰헤임 한복판이건 어디건 상관없어. 오히려 스림을 아작 낼 수 있다면 나야 좋지. 근데.. 내가 프레이야를 어떻게..?]
[물론입니다. 이번 일은 형님께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이 수습하셔야 정리가 됩니다. 로키나 저는 그 다음이구요. 설마 형님은 우리 여동생들을 형님 대신에 그런 곳에 보낼 건가요?]
[나를 뭘로 보고! 내가 우리 여동생들을 어떻게 그런 곳에 보내?! 근데.. 내가 어떻게 프레이야..]
항변을 하던 토르가 프레이야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오딘과 로키도 토르와 프레이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토르와 프레이야는 너무도 차이가 많이 났다. 성별은 둘째 치고, 먼저 체격부터 차이가 심했다. 큰 키에 태산만 한 덩치를 지닌 토르와 아담하고 가녀린 체구의 프레이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토르의 키와 덩치를 무엇으로 가리고 숨길 수 있을 것인가? 다음으로 토르가 분명히 미남이긴 하지만 여자의 아름다움, 특히 프레이야의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턱이 없다. 아무리 화장으로 가리고, 옷을 입힌다고 해도 스림을 속일 수 있을까? 그러나 헤임달은 생각이 달랐다. 헤임달이 로키에게 물었다.
[로키, 스림이란 녀석이.. 내가 아는 그 스림 맞지? 그 손버릇 더러운?]
[맞아, 아랫도리 버릇도 아주 드러운 놈이지.]
로키가 배시시 웃었다. 로키는 헤임달의 계획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헤임달도 배시시 웃었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 녀석은 한 번도 프레이야를 본 적도 없을테니까.]
[맞아요.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 녀석 프레이야에 대한 소문만 알고 있었어요.]
로키가 거들고 나섰다. 토르가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잠깐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이 덩치를 숨기고, 프레이야의 미모를 감당하냐고!]
[형님, 우리 아스가르드의 시녀들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그녀들은 여자를 꾸미고 가꾸는 데 있어서만큼은 이 세상 최고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냥 믿고 맡기면 돼요. 형님을 프레이야에 버금가는 최고의 미녀로 만들어드리죠.]
활짝 미소를 짓는 헤임달에게 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헤임달이 오딘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시간을 길게 끌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 검은 얼음산 밖에 있는 거인들까지 이 상황을 알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멍청한 스림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길어지면 알아챌 수도 있구요. 늦어도 열흘 내로 끝내겠습니다.]
헤임달이 로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로키, 일단 약을 쳐야겠어. 스림에게 곧 프레이야를 보내겠다고 전해줘. 그리고 알지?]
[걱정 마. 내가 스림의 아가리를 찢어서라도 처먹일 테니까.]
로키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로키로서는 모처럼 아주아주 재미난 일이 한가득 생긴 것이라 더없이 즐거웠다. 로키는 헤임달의 생각을 이미 알았기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로키는 오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신이 나서 그대로 스림에게로 향했다. 토르는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프레이야는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헤임달이 그런 프레이야에게 말했다.
[프레이야,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당신으로서는 내키지 않을 일이긴 하지만.. 아스가르드를 위해 부탁을 좀 하겠습니다. 당신의 목걸이, 브리싱가멘을 좀 빌려주세요.]
[아..]
프레이야는 손에 든 브리싱가멘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토르 형님을 당신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브리싱가멘에는 어떤 흠도 생기지 않게 지금 모습 그대로 돌려줄 것을 약속합니다.]
헤임달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헤임달과 오딘, 토르를 번갈아 보던 프레이야는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프레이야는 떨리는 손으로 브리싱가멘을 헤임달에게 건네주었다. 헤임달이 프레이야에게 따뜻한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프레이야에게서 브리싱가멘을 건네받은 헤임달은 오딘을 바라보았고,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오딘의 승인도 났으니 남은 것은 빠르고 신속한 실행이다. 오딘은 자리에서 내려와 프레이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무실을 떠났다. 남은 것은 헤임달과 토르뿐.
[형님, 그럼 우리도 이제 가서 준비를 좀 할까요?]
헤임달이 방긋 웃어 보이더니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토르는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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