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림(þrymr, Thrymr : 술렁거림, 소음, 소란)'은 요툰헤임에서도 '거인의 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실력자들 중 한 명이다. 스림은 요툰헤임에서 검은 얼음산으로 불리는 지역을 다스렸다. 그의 세력은 강했고, 지역의 곳곳에 이르기까지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스림이 스스로 일군 것은 아니다. 상당 부분은 검은 얼음산 지역에 자리를 잡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그러나 스림은 검은 얼음산 지역을 다스리는 것에서는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거인들이 대체로 그렇듯, 스림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때로는 세력을 넓히고 다스리는 것에, 때로는 술이나 유흥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이 길게 가지는 못했다. 스림은 그 모든 것에 너무도 빨리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흥미가 사라진 것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검은 얼음산 지역을 다스리는 것은 의무라서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있었지만, 늘 새로운 흥미거리를 필요로 했다. 오랫동안 흥미거리를 찾아다니던 스림은 드디어 자신이 오랫동안 즐길 흥미거리를 찾았다. 바로 '도둑질'과 '계집질'이었다.
스림은 도둑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들킨 적도 없었고, 그로 인해 책임을 진 적도 없었다. 설령 들켰다한들, 검은 얼음산의 주인에게 책임을 요구할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인은 거의 없었다. 이렇다 보니 스림은 점점 과감하게 도둑질을 이어갔다. 스림에게 도둑질의 쾌감은 더없이 훌륭한 즐거움을 주었다. 이 시기 스림은 한 거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숨어드는 것은 물론, 도둑질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였다. 그의 실력에 비한다면, 스림의 실력은 고작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는 바로 도둑질과 사기와 기만의 신, '로키'였다. 스림은 언젠가는 로키를 뛰어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꾸준하게 도둑질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스림은 로키에 버금가는 '대도(大盜)'가 되었다.
스림이 도둑질 다음으로 흥미를 가진 것은 '계집질'이었다. 스림은 어려서부터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고, 그로 인해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상대가 처녀건, 남편이 있건 스림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유혹을 하건, 완력을 쓰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취했다. 그러다 상대에게 흥미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그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버렸다한들, 검은 얼음산의 주인에게 책임을 요구할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인은 거의 없었다. 스림에게 이 고약한 취미(?)는 전혀 질릴 일이 없었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아주 많았으니까.
해가 하늘 가운데로 올라갈 즈음, 스림은 고깃덩이와 금으로 만든 줄을 들고 저택의 마당으로 나왔다. 스림의 사냥개가 그를 보며 격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스림은 사냥개에게 고깃덩이를 던져주더니, 그 자리에 앉아서 금으로 만든 줄을 잘 꼬아서 사냥개의 목에 걸어주었다. 스림은 다시 몸을 일으켜 갈색 점박이 말을 마구간에서 데리고 나와 저택 앞 강으로 향했다. 스림은 말을 씻기고 빗질을 해주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마치 누군가 보라는 듯이. 스림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스림 혼자였음에도. 스림이 오랜 빗질이 지겨워질 때 즈음, 누군가 강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스림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로키였다.
[그러다 그 녀석 갈기가 남아는 나겠어?]
[이야~ 이거 오랜만이우? 우리 배신자 양반.]
스림은 빗질을 멈추고 손으로 말을 쓰다듬었다. 로키는 날씨라도 보듯 하늘을 둘러보더니 '훅!' 하며 코를 삼켰다.
[날씨 하고는.. 아우~! 요즘은 요정들도 그렇고, 아사 신들도 영~ 꼬라지가 엉망이지. 내가 왜 왔는지 알지?]
[그걸 내 어찌 알겠수? ]
스림은 빗에 달라붙은 말의 털을 떼어내며 대답했다. 로키는 귀가 가려운 듯, 손으로 귀를 후볐다. 잠시 둘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스림은 스림대로 제 할 일을 했고, 로키는 로키대로 귀를 팠다.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 사이로 말의 푸레질 소리가 화음을 맞추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스림이었다.
[참 어지간하시네.]
[남 말은.. 다 아는 처지에, 시간은 끌지 말자. 어차피 날 기다렸잖아?]
로키가 새끼손가락으로 파낸 귀지를 튕겼다. 그제서야 스림이 로키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야~ 티가 났수? 내 딴엔 연기 좀 해본다고 한 건데?]
[그따위로 해서는 내가 아니라도 다 알겠다. 됐고, 내놔.]
로키의 말에 스림이 의뭉스레 물었다.
[뭘 말이요?]
[아! 적당히 하자고~]
로키가 짜증을 내자, 스림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알았수. 알았어. 근데 용케도 알았네? 난 걸 어찌 알았을까?]
[그 정도 실력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은 너밖에 없으니까.]
로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림이 말했다.
[이야~ 난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여기서 더 오래 걸리면 내가 로키가 아니지. 내놔. 그럼 살려는 드릴께.]
로키가 스림을 쳐다보자, 스림도 물러서지 않고 로키를 쳐다보았다.
[에헤이~ 뭔 농담을. 그렇겐 못하지. 나도 목숨 걸고 한 일인데. 망치는 이 요툰헤임의 어딘가 아주 깊은 땅 속에 있어. 어딘지는 나만 알지. 뭐,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시던가.]
[아주 죽으려고 용을 쓰는구나? 토르가 여기를 알면 어떻게 될지 상황 파악이 안돼?]
로키가 기가차다는 듯 쏘아보자, 스림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지가 간수를 못해놓고 주워온 사람에게 탓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뇨? 토르라고 해도 망치도 없이 여기 와서 멀쩡히 돌아갈 수 있으려나? 배신지 형님, 나 스림이야. 여긴 내 나와바리라고?]
- 로키에게 스림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로키는 스림이 쉽게 묠니르를 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스림이 이렇게 말을 돌리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하아.. 그래, 조건은?]
[내가 일단은~ 망치를 좀 쓸 일이 있어서 말이지. 내가 아주 우람하고 단단한 못대가리가 있거든? 이걸 망치로 판때기 구멍에 박아 넣고 나면~ 나도 망치가 필요 없어질 것 같긴 하네?]
스림이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었다. 로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지만.
[그러니 당신이 그쪽에 말 좀 잘 전해주셔. 나 스림이 아주 질 좋은 판때기를 구한다고. 그쪽 동네에 좋은 판때기들이 아주 널렸다던데? 프리그라던가, 시프라던가.. 아! 프레이야라는 년이 아주 삼삼하다던데? 그 년을 나에게 준다면~ 음! 적당할 것 같군.]
[하아?]
로키가 예상한 대로였다. 스림이 몸을 돌려 말고삐를 잡았다.
[프레이야를 내게 넘겨. 밑지는 장사는 아니잖아? 그럼 내가 망치는 잘 쓰고 넘겨줄 테니까. 뭐, 완력을 쓰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이 참에 그쪽 동네랑 우리 동네랑 사생결단을 내도 난 별로 상관없으니까.]
말을 마친 스림은 말을 끌고 그대로 강둑을 올라 저택으로 돌아가버렸다. 스림이 사라지자, 로키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놔.. 이거 쉽지 않겠는걸?]
로키는 매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단 묠니르가 있는 곳은 알았다. 방법은 좀 생각해봐야 하지만. 로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토르와 함께 방법을 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