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임달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헤임달은 곧바로 자신의 부관을 불러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명령을 내렸다.
헤임달의 저택인 '히민뵤르그(Himinbjorg : 천상의 성)'가 매우 분주해졌다. 헤임달의 부관은 먼저 부하들 중에서 현명하고 용맹한 자들로 서너 명을 뽑아 짐꾼으로 꾸몄고, 위장용 예물 준비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예물이 들어있는 것으로 꾸몄지만, 만약을 위해 그 아래에는 부하들이 사용할 무기를 숨겼다. 잠시 후,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솜씨 좋은 시녀들이 히민뵤르그에 도착했다. 헤임달은 자세한 내막은 숨기고, 그녀들에게 토르를 아름다운 미녀로 변신시켜 달라고 말했다. 헤임달의 말을 들은 시녀들은 토르를 보며 멈칫했다. 헤임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녀들에게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렇기에 그대들이 필요합니다. 난 그대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홉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이들이라 믿습니다! 난 그대들보다 더 솜씨 좋은 예술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는 나와 우리 아스가르드의 자랑입니다! 부디 지금부터 그대들의 솜씨를 마음껏 보여주길 바랍니다.]
헤임달의 말을 들은 시녀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들의 내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뜨거운 자부심과 강한 도전의식이 차올랐다. 시녀들은 서로 눈빛을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각자의 전문 분야에 맞춰서 바쁘게 움직였다. 헤임달은 그녀들 사이에 서서, 이들을 조율하고 모든 과정을 직접 감독했다. 아사 신족 중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지닌 헤임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아, 아름다운 처녀로다!', 엘머 보이드 스미스 그림(1902.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or )
한편, 토르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예전 '스카디(Skaði : 해치는 자)'가 느꼈던 어색함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토르는 시녀들에게 이끌려 홀 한가운데에 섰다. 한 무리의 시녀들은 토르의 몸에 색과 재질이 여러 가지인 옷감을 대보았다. 다른 시녀들은 사다리와 의자까지 가져와 토르의 몸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토르는 얼음처럼 단단히 굳은 채로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그때 화장을 담당한 시녀들이 서로 수군거리더니 그중 하나가 헤임달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헤임달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토르에게 향했다. 헤임달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잔뜩 긴장한 표정의 토르가 물었다.
[왜? 불안하게 왜 그래... 또 뭔데?]
[흠.. 그렇겠군. 이대로는 안 되겠어. 형님, 이 참에 면도 좀 하시죠?]
헤임달의 말에 토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이건 내 자존심이라고!!!]
토르가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온 홀이 흔들렸고, 시녀들은 깜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토르의 치수를 재던 시녀가 그만 사다리에서 떨어졌는데, 헤임달이 가까스로 받아냈다. 헤임달이 시녀를 바닥에 내려주고는 짐짓 화난 표정으로 토르를 보았다.
[다들 놀랐잖아요.]
토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안함을 전했다. 토르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수염만큼은 어떻게 안될까? 왜, 난쟁이들은 여자도 수염이 있다쟎아? 응?]
[형님.. 프레이야가 난쟁이는 아니잖아요? 묠니르, 안 가져와도 돼요? 지금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할까요? 네?]
헤임달이 지긋이 토르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토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헤임달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시녀들을 불렀다. 다시 토르를 여자로 만들기 위해 시녀들의 바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토르도 미련을 내려놓고, 시녀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나 토르의 마음속에는 묠니르를 훔쳐가고, 자신의 자존심을 저 지하로 처박아버린 스림을 향한 분노가 단단하게 다져졌다. 소란스러운 홀 안으로 역시나 발걸음까지 소란스러운 로키가 들어왔다.
[여어~ 준비는 잘 되가?]
[아, 왔어? 어떻게 약은 좀 받아먹던가?]
헤임달이 로키를 향해 손을 들며 물었다. 로키가 헤임달의 손을 치며 대답했다.
[내가 처먹이는데 지가 안 먹고 배겨? 아주 제대로 몸이 달게 해 줬지. 스림 녀석, 아마 며칠 동안은 정신 못 차릴걸? 프레이야를 보내준다고 하니 아주 입이 귀까지 찢어지더만. 얼굴까지 벌게져서는 침까지 질질 흘리더라고. 이야~ 어떻게 소문으로만 들은 프레이야에 그렇게 되는 건지 원..]
헤임달이 로키에게 손짓으로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로키의 역할은 아직 남아있었다. 로키는 '킥킥'거리며 의자로 가서 앉았다. 로키가 의자에 앉자, 시녀가 다가와 로키의 어깨 위로 천을 둘러주었다. 로키가 거울에 비친 헤임달을 보며 말했다.
[뭐, 일단 우리도 신으로서 체면이 있어서 그냥 조용히 보낸다고 했어. 스림 녀석,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좋다고 허허~ 거리더만. 어라? 이게.. 누구야?]
로키가 황급히 옆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아주 아름다운 미녀(?)가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바로.. 토르였다. 토르가 로키를 째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나 지금 아주 저기압이니까.]
[응? 응.. 풉.. 푸하하!!! 아하하하하!!!]
로키가 손뼉도 모자라 눈물까지 흘리며 크게 웃었다. 로키의 웃음소리가 홀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로키를 따라 웃었다. 미간을 움찔거리던 토르는 거울에 비친 헤임달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속으로 화를 삭였다.
[형님, 주름이 있으면 화장이 잘 안 먹어요. 얼굴 펴요. 있잖아, 저기 오른쪽 눈밑이 톤이 살짝 엷은 것 같은데?]
헤임달의 말에 화장을 담당한 시녀가 토르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다시 화장을 수정했다. 로키도 토르의 옆에서 머리를 다듬고, 여자처럼 화장에 들어갔다.
[그렇지, 그렇지. 여자는 화장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야. 아, 난 수분광으로 내줘~ 도톰하고, 탱글 하게~]
[으응~ 로키, 그건 아니지. 시녀가 더 돋보이면 안 된다고. 일단 프레이야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는 설정이니까.. 조금 올드하게 가야지.]
로키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헤임달을 보았다.
[아.. 난 탱글탱글한 게 좋은데.. 그럼 한 마흔 즈음이면 되려나?]
[네 녀석은 여장하는 게 즐거운가 보군.]
토르가 불평을 하자, 로키가 큭큭거리더니 여자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로키답게 더없이 완벽한 마흔 즈음의 여자 목소리였다.
[어머~ 이게 다 절친한 친구인 너를 위해서쟎아~ 걱정하지 마~ 이 로키 언니가 아주 자알~ 모실테니까아~]
[이제 둘 다 조용히! 그렇게 떠들면 시간이 더 걸린다고.]
헤임달이 토르와 로키를 제지하고는 시녀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로키의 화장을 시작으로 다시 한참 동안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화장이 끝나자, 다음은 드레스였다. 토르가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는 물론 로키가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까지 모두 준비가 되었다. 헤임달은 두 신에게 옷을 입히고 장신구를 달아주는 동안, 여전히 뒤에서 시녀들을 조율하고 지휘했다.
[잠깐~ 거긴 파란 보석이 더 어울릴 것 같아. 그렇지. 응. 아, 거기는 조금 더 긴 걸로! 로키 쪽 귀걸이는 무난하게 둥근 걸로 가고, 이쪽은 꽃장식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브리싱가멘 준비됐지? 좋아!]
어떤 패션 디자이너에게도 뒤지지 않을 헤임달의 지휘에 따라 드디어 토르와 로키는 프레이야와 그녀의 시녀로 변신을 마쳤다. 토르와 로키를 보며 모든 시녀들이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모두가 자신들이 혼신을 기울여 만들어낸 이 위대한 걸작품에 기뻐했고, 그중에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녀도 있었다. 헤임달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토르가 영 어색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찔거렸다.
[하아.. 불편해. 그나저나 여자들은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달고 다니는 거지?]
[응? 토르 언니는 맘에 안 들어? 나랑 바꿀래? 난 큰 게 좋은데?]
[됐거든.]
로키가 아양을 떨며 말하자, 토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헤임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헤임달이 놓친 것이 있었다. 바로 토르의 목소리. 어찌 되었건 토르의 외모만큼은 아주 아름다운 미녀로 변신시켰지만, 토르의 저 굵은 목소리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목소리까지도 어떻게 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결국 헤임달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토르 형님, 스림의 저택으로 들어서면 형님은 가급적.. 아니 그냥 말을 하지 말아요. 형님 목소리 때문에 다 들킬 테니까. 대신 로키! 네가 좀 수고를 해야겠어. 어차피 이번 결혼식에서 신부가 말할 일은 그다지 없으니, 네가 상황에 맞춰서 잘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야! 알았지?!]
[걱정 마! 내가 또, 임기응변의 귀재 아니겠어?]
로키가 엄지손가락 들어 보였다. 토르에 비해 덜 꾸며놓았음에도, 로키는 정말 여자가 아닌가 싶었다. 로키는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외모, 행동은 물론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마흔 줄에 접어든 시녀 그 자체였다. 아스가르드 정문 뒤로 토르와 로키 그리고 그들을 뒤따를 짐꾼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열했다. 출발하기 전, 헤임달은 로키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알아서 잘할 테지만..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어. 첫째, 토르 형을 확실하게 관리해줘야 해. 워낙 다혈질이니까. 둘째, 묠니르가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키지 않게 해. 묠니르를 회수하면.. 뭐, 그때부터는 토르 형이 알아서 잘할 테니. 셋째, 가능하다면 브리싱가멘은 손상이나 흠집 없이 챙겨줘.]
[어머? 우리 헤임달은 이 누나를 못 믿니? 걱정 마~ 나만 믿어!]
로키가 헤임달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스가르드의 성문이 열리고, 토르.. 아니 프레이야의 혼례행렬이 길을 떠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헤임달은 혼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