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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May 03. 2023

16.여자가 된 토르-일곱 : 미녀는 괴로워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토르, 로키, 스림, 묠니르

#. 미녀는 괴로워


 아스가르드를 출발한 새 신부 일행은 오랜 시간을 걸어 검은 얼음산 지역에 접어들었다. 로키는 즐거움을 숨기지 않았지만, 토르와 헤임달의 부하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새 신부 일행은 로키와 스림이 만났던 그 강가에 도착했는데, 강 건너 언덕 위로 스림의 저택이 보였다. 로키는 모두를 멈춰 세웠다. 토르의 주위로 검은 얼음산의 차가운 바람보다도 더 흉흉한 기운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토르, 진정해. 보여? 저기가 스림의 집이야. 하인들이 알아보고 마중을 나오는구먼. 지금부터는 그 살기를 죽이고, 좀 다소곳한 척이라도 하라구. 뒷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묠니르가 손에 들어올 때까지는 그냥 얌전한 새 신부인 척만 해. 알았지?!]


 로키가 원래의 목소리로 토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화가 났지만, 그 말을 못 알아들을 토르가 아니었다. 토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소곳하게 자세를 고쳤다. 로키는 헤임달의 부하들을 향해서도 낮게 말했다.


[너희는 짐을 내리고 돌아가는 척하다가 저 뒤에 있는 숲 속에 숨어있어. 너희까지 나설 상황은 없을 것 같긴 한데..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알았지?]


 로키의 말에 헤임달의 부하들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스림의 하인들이 강가로 내려왔다. 로키가 다시 살랑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로 하인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유~~ 좀 일찍 나오시지~ 길이 어찌나 험한지~ 오느라 고생했다구요~]

[이들이 전부요?]


덩치가 큰 하인이 묻자, 시녀로 변장한 로키가 대답했다.


[네. 본 혼수품은 찬찬히 올꺼예요. 급한 대로 일단 필요한 것만 간추려서 왔으니.. 댁들도 알다시피~ 우리가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올 수가 있어야죠~ 으응~ 우리 여신님이 시집을 가시는 건데, 너무 아쉬워요. 아휴.. 로키도 너무하지잉~ 이 세상 최고의 여신인데, 어후! 진짜! 이봐요! 뭘 보는 거예요?! 어디 신랑보다도 먼저 신부 얼굴을 훔쳐보려구! 떽! 못써요! 이제 여기 안주인이 되실 분인데, 그건 무례라구요! 어우! 진짜!! 어서 저택으로 안내하라구요! 우리 여신님을 이대로 서 계시게 할 거예요?! 어서요!!]


 로키가 너스레를 떨며 하인들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하인들은 로키의 말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새 신부 일행을 저택으로 안내했다. 스림은 급하게 준비해서 올리는 결혼식이라 검은 얼음산의 거인들도 제대로 초대하지 못했음에도 저택은 모여든 거인들로 매우 소란했다. 스림의 저택 근처에 사는 일가친척과 심복들 정도가 모였음에도 이미 저택의 앞마당까지 '인산인해(人山人海 :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여있는 모습)'를 이루었다. 스림의 하인이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그 사이 프레이야의 시녀는 짐꾼들에게 예단을 저택의 안으로 옮기고, 아스가르드로 가서 나머지 혼수품을 가져오라고 요란하게 닥달했다.


- 신부로 변장한 토르와 들러리로 변장한 로키, 칼 라르손 그림(1893.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C3%9Erymskvi%C3%B0a )


 프레이야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스림은 기쁨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결혼식을 앞둔 시간은 신랑에게는 매우 설레는 시간이다. 하물며 세상 최고의 미인인 프레이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세상 어떤 남자가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새 신부 일행이 들어서자, 스림의 기쁨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입이 귀에 걸린 것도 모자라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했다. 흥분한 스림이 새 신부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시녀가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이, 참! 스림님! 릴랙스~ 체통을 지키셔요. 남들이 봐요! 쫌!]


시녀의 말에 스림이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객들이 그런 스림을 보며 크게 웃자, 스림도 무안한 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그런가?]

[흐흥~ 어차피.. 이따 밤에 두 분이서 오붓하게 보내실 텐데~ 으응~! 릴. 렉. 스!]


 시녀가 무안해하는 스림에게 다가가 가만히 속삭였다. 스림은 시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연실 고개를 끄덕였다. 스림은 반갑게 프레이야와 그의 시녀를 곧장 결혼식이 열릴 커다란 홀로 안내했다. 스림의 뒤를 따라 프레이야와 시녀가 들어서자 하객으로 모인 거인들이 박수를 치며 큰 환호성을 질렀다. 스림은 준비된 자리에 올라 프레이야를 옆자리에 앉혔다. 프레이야의 시녀는 혼주(婚主)를 대신해 프레이야의 곁에 앉았다. 스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객들을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자! 내가 드디어 장가를 간다! 그것도 세상 최고의 미녀, 프레이야에게 말이지! 하하하!! 나는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어! 금으로 된 뿔이 있는 젖소와 거세된 까만 수소도 넘쳐나지! 내가 아쉬웠던 건 프레이야뿐! 근데, 이제 그녀가 내꺼라고! 그녀를 탈 수 있는 건 나뿐인 거지!! 하하하!!]


스림이 크게 웃자, 하객들도 함께 소리높여 웃었다. 흥이 오른 스림은 큰소리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그동안 아무도 못한 일이지! 누가 생각이나 해봤는가?! 토르의 망치를 손에 넣고, 이렇게 프레이야까지 빼앗아 올꺼라고 말이야! 죽어라 노가다만 하다 뒈진 놈(아스가르드의 성벽 참조)이나, 헛지랄만 하다가 지 딸만 늙다리에게 바친 '샤치(Þjazi : 스카디의 아버지, 이둔납치사건 참조)' 따위는 상대도 안돼! 알겠냐!? 내가 해냈다고!!!]

[스림, 당신은 최고로 운 좋은 거인이야! 요툰에! 검은 얼음산에 영광 있으라! 비열한 신들에게 죽음보다도 더한 굴욕을! 스림, 만세!]


 하객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고, 프레이야의 시녀마저도 뭐가 기쁜지 연실 싱글벙글하며 스림과 거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박수를 쳤다. 정작 새 신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스림은 이내 자리를 떠나 한참 동안 자랑을 늘어놓으며, 하객들과 더불어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스림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와 프레이야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래도 새 신부를 두고 술부터 퍼마신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혼자만 기뻤나 보오. 저.. 이거라도 들지 않겠소?]


 프레이야가 살짝 고개를 들어 스림이 내민 음식 접시를 보았다. 베일에 가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에 스림의 가슴이 더욱 요동쳤다. 잠시 후, 프레이야는 가만히 손을 들어 연어 한 마리를 집어 베일 안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스림은 환하게 웃으며 하객들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하객들도 함께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즐거워했다.


 [(젠장.. 언제까지 저 꼴을 보고 있어야 하지? 일단 배부터 좀 채우자. 저것들을 때려잡으려면 속이 든든한 게 좋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문제가 생겼다. 며칠 동안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토르가 자신도 모르게 평소와 같은 식욕을 보이고 말았다. 연어 한 마리로 시작한 식사는 순식간에 소 한 마리와 연어 여덟 마리.. 그리고 커다란 술잔에 담긴 미드를 세 잔이나 연달아 먹고 마셨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던 스림과 거인들은 새 신부의 놀라운 먹성을 보며 깜짝 놀랐다.


 [저.. 저게.. 프레이야란 말이야? 아름다운 여신이라던데, 저렇게 먹보란 말이야?]


하객들이 여기저기서 수근대자 프레이야의 시녀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아잉~ 뭘 그렇게 놀라세요~ 실은 말이죠.. 우리 여신님께서 이 결혼을 준비하는 지난 8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답니다. 위대한 거인의 왕, 사내중의 사내 스림님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에 너무도 설레여서 말이지요. 제가 그동안 음식을 권했지만 어찌나 설레여 하시던지 한 입도 드시지 못했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스림님을 만나니 너무도 기뻐서 배가 고프다란 사실을 깨달으셨나 보네요. 아잉~ 우리 여신님도 참! 스림님~ 이만큼, 우리 여신님께서는 당신을 연모하고 있었답니다~]

[에? 하하하! 그런 거구먼~!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얘들아, 가서 목장의 소를 모조리 잡아다 구워! 내 아내가 나를 그리워하느라 식사도 못했다니.. 훌쩍.. 뭐 해! 얼른 서두르지 않고!]


 시녀의 말에 스림은 더욱 기분이 좋아져 하인들을 닥달했다. 그제야 거인들도 '와하하' 하는 웃음을 터뜨렸고, 다시 분위기가 흥겹게 달아올랐다. 스림이 다시금 하객들과 어울려 술잔을 부딪히는 동안, 시녀는 다시 새 신부의 곁에 앉았다. 시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덮고 있던 무릎담요를 프레이야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잠시 후,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된 스림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스림은 휘청거리며 프레이야에게로 다가섰다.


[헤에~~ 내 신부의 아름다운 얼굴을 여기 모인 모든 손님들에게 보여줘야지~ 자랑할꺼야~~ 이제 프레이야는 내꺼니까아~ 헤헤~]


스림이 신부의 베일을 벗기려고 하자, 화들짝 놀란 시녀가 스림을 가로막았다.


[아이~ 성질도 급하셔라~ 아직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신부의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되죠! 으응~ 스림님도 참.. 아잉~ 좀 참으세요. 저들에게 자랑하기 전에 우리 여신님과 오붓~한 밤을 보내시는 게 먼저라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건 그다음에도 늦지 않답니다.]

[그.. 그런가?]


볼 빨간 스림이 멍청한 표정으로 시녀에게 되물었다. 시녀가 다시 은근하게 스림에게 속삭였다.


 [그럼요~ 게다가 우리 여신님은 다른 평범한 여자와는 차원이 다르죠.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인 중에 미인, 여신 중에 여신이쟎아요~?]


 로키가 다시 알랑거리며 살살거리자, 스림은 더욱 벌겋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우헤헤헤~ 그치? 근데.. 난 내 신부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고오오~~ 헤헤.. 이건 나만 보는 건 괜찮치이~~~ 헤헤..]


- 새 신부의 눈이 붉은 이유는?


 스림이 자신을 가로막은 시녀를 한쪽으로 밀치더니, 입을 맞추기 위해 새 신부의 베일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스림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새 신부의 눈빛이 너무나 격렬하다 못해, 마치 불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시녀가 황급히 새 신부의 베일을 다시 내리고는 스림을 부축했다. 스림이 시녀에게 물었다.


[이.. 이봐! 프.. 프레이야가 이상한 것 같아.. 왜 저.. 저렇게 날 노려보는 거야? 마치 눈빛이 꼭 무스펠의 불꽃같아..?!]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사실 우리 여신님께서 지난 8일간 한 잠도 주무시지 못했답니다. 어떻게 하면 스림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 드릴까 하는 걱정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내셔서 그렇답니다. 밤새 저를 붙잡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셔서 저도 많이 힘들었답니다. 지금 여신님의 눈이 붉은 것은 그것 때문이죠. 얼마나 스림님을 그리워했으면 눈빛마저 붉게 변했을까요? 아구궁.. 저 붉은 눈빛은 바로 스림님을 향한 여신님의 열정이랍니다. 호호~]


스림은 시녀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정말 사랑이 가득 담기다 못해 붉어진 것 같았다. 이에 스림은 욕정이 끓어올라 이제는 더 이상 프레이야를 품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스림은 결혼식 따위는 어서 빨리 끝내버리고 프레이야를 품고 싶었다. 스림이 하인을 부르려는데,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크게 소리쳤다. 스림의 늙고 못생긴 여동생이었다.


[프레이야! 내 새 언니가 되고 싶어? 그럼 예의를 지켜야지~! 니가 내 사랑과 내 호의를 가지고 싶다면, 지금 니가 끼고 있는 그 반지! 그 황금 반지를 나에게 넘겨! 어디 날로 먹으려고 그래~ 내놔! 지금 당장!]


 스림의 여동생은 허영심이 많고 질투가 심했는데, 스림이 요란스레 결혼을 준비하는 꼴이 못마땅했다. 스림의 상대가 프레이야라는 말에 그녀에 대한 질투심도 끓어올랐다. 스림이 이리저리 흥겹게 자랑하고 다니는 꼴을 보며,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프레이야가 지닌 장신구가 들어왔다.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왼손 끝에서 오른손 끝까지. 새 신부를 감싸고 있는 화려한 장신구를 보고 있자니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를 참지 못하고,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스림은 불같이 화를 내더니 식탁의 접시를 들어 여동생을 향해 집어던졌다. 접시는 스림의 여동생의 귓가를 스쳐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닥쳐! 감히 내 여자의 물건을 달라는 거야! 꼴 같지 않은 게 어디서 벌써 시누이 짓이야! 닥치고 앉아! 가문에서 파버리기 전에!!]


스림의 분노에 순식간에 좌중이 얼어붙었다. 스림의 분노에 그의 여동생도 분노로 몸을 떨다가 자리에 앉아  '흥!'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을 노려보던 스림이 소리쳐 하인을 불렀다.


[어서 묠니르를 가져와라! 이제 결혼식을 끝낼 것이다! 내 신부의 무릎에 묠니르를 올려놓고 이 지겨운 결혼식을 끝내야겠어!]


하인에게 명령을 내린 스림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스림은 하객들을 다그쳐 술잔을 채우게 하고는 다시 연거푸 건배를 했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이 돌자, 다시금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 사이 시녀가 놀란 프레이야를 한참 동안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이구.. 우리 여신님~]


몸을 일으킨 시녀는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었다. 그러더니 다시 밝게 표정을 바꾸고는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아이코! 내 정신 좀 봐~ 신랑 예물을 깜빡했네~ 금방 가져올께요~]


시녀는 큰 엉덩이를 흔들거리며, 홀을 나와 짐꾼들이 가져온 예물을 보관하는 방으로 향했다. 시녀가 복도를 지나 예물을 보관하는 방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가 결혼식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마주친 거인은 아무도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시녀는 순식간에 표정도, 자세도 바뀌었다. 시녀는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 피곤해~ 이제 내 역할은 여기까지! 토르, 이제 네 차례야. 마음껏 날뛰어보셔.]


 로키는 소매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헤임달의 마지막 주의사항인 프레이야의 목걸이, 브리싱가멘이었다. 로키는 가만히 브리싱가멘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손상을 입거나 별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로키는 브리싱가멘을 목에 건 다음 조용히 스림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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