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온 인간의 땅에서 토르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오래된 시골 마을에 놀러오는 기분이 들었다. 토르는 미드가르드와 인간을 사랑했다. 미드가르드의 인간도 토르를 사랑했다. 인간은 토르를 경건하게 모셨고, 때마다 그에게 제례를 올렸다. 토르도 자신을 따르고 존경하는 인간에게 한없이 자애로웠다. 토르는 미드가르드를 넘보는 거인들로 부터 인간을 지켜주었고, 틈틈히 인간의 괴로움을 풀어주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토르는 모든 인간에게 사랑받았는데, 특히 귀족보다는 평민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토르는 로키와 이런 저런 농담을 곁들이며, 모처럼 미드가르드의 공기를 한껏 맛보았다. 여유로움을 즐기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봐, 토르. 어디 쉴만한 곳을 찾아보자구. 여행 첫날부터 이슬을 맞으면서 노숙을 하기는 싫어.]
[음~ 그것도 그렇군. 여행은 이제 시작이니 말이야. 어디 쉴만한 곳이 없을까?]
토르는 마차의 속도를 늦추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넓은 들판과 산이 보일 뿐, 마을은 커녕 인가도 보이지 않았다.하늘의 붉은 기운도 사라지고, 푸르른 어두움이 내릴 무렵, 저멀리 작고 허름한 농가가 보였다. 토르는 이슬을 피해 잠을 잘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농가를 향해 마차를 몰았다. 농가는 미드가르드의 시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으로, 외양간도 없이 작고 허름했다. 토르는 이런 작은 오두막에서도 왠지모를 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로키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이건.. 좀.. 심한걸?]
[난 좋은데? 우리는 새벽 이슬만 피하면 되잖아? 시끄러운 여관보다는 훨씬 정감있고 좋지 뭘 그래?]
토르의 대답에 로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주인인 듯한 농부가 나왔다. 머리카락과 수염에 희끗함이 보였는데, 실제 나이는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농부는 손님을 맞이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터라 머뭇거리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토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로키가 신으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난 지혜로운 신 로키이며, 여기 이 분은 너희들의 수호신이자, 위대한 전사인 토르니라.]
로키의 위엄있는 모습과 말을 보고 들은 농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토르는 농부와 로키를 번갈아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신분은 좀 숨기자니까. 갑자기 그렇게 본 모습을 드러내면 어떻해? 이 자가 너무 놀라버렸다고.]
[헤헤~ 하지만, 재미있잖아?]
로키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고, 토르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새 농부의 아내와 그들의 어린 남매가 나와 농부의 곁에 함께 엎드렸다. 이들 농부의 가족은 두 신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그도 그럴것이.. 토르야 인간의 수호신이고 자애로운 신이지만, 로키는 더없이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신이기 때문이다. 로키는 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쿡쿡거리며 웃었다. 토르는 이들을 안쓰럽게 내려보며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천둥신 토르다. 난 너희에게 해를 입히러 온 것이 아니다. 여행을 하는 도중, 마땅히 쉴만한
곳을 찾던 중이니라. 마침 이 곳의 불빛을 보고 찾아온 것이니겁내지 말거라. 헛간이라도 좋으니 밤이슬만 피하게 하룻밤 재워주면 충분하다.]
토르가 가볍게 농부의 어깨를 토닥였고, 그제야 농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농부는 아내와 어린 남매를 토르와 로키에게 인사시키고, 두 신을 정중히 집안으로 안내했다.
오두막의 외관처럼 농부의 집안도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토르는 작은 실내에 단촐한 가구가 보일뿐이라 토르는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토르는 괜히 자신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이 순박한 농부 가족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농부는 토르와 로키를 식탁으로 안내한 뒤, 급히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해 내왔다. 이들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저녁식사였지만, 멀건 스프에 몇가지 채소가 곁들여 진 것이 전부였다. 잔뜩 고개를 숙인 아내의 곁에 선 농부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위대한 신들께서 친히 찾아주셨는데, 찬거리가 이리 변변치 않아서...]
토르는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들이 내어 놓은 이 저녁거리는 이들의 하루 식량 이상일 것이다. 토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농부에게 물었다.
[자네들 고기를 먹어본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예?그.. 그게..]
농부가 말을 흐리자, 농부의 곁에 있던 계집아이가 말했다.
[고기는 오랫동안 구경도 못했어요.]
[얘가! 어디 신들 앞에서..]
농부의 아내가 서둘러 딸을 막아서며 무어라 혼을 내려 했다. 그때 토르가 가만히 손을 들어 농부의 아내를 말렸다. 그리고 농부에게 말했다.
[괜찮다면 자네 가족들도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어떤가? 저 밖에 있는 내 산양들을 잡을테니, 우리와 함께 먹도록 하게.]
[하.. 하지만 어떻게 신의 산양을...]
농부는 고기를 먹게 된 기쁨에 앞서 난감하고 두려운 마음이 먼저 일었다. 자신들의 수호신인 토르의 산양에 손을 대는 것도 불경스러울진데, 그 고기를 감히 신들과 함께 나눠먹는다니. 겁을 먹은 농부와 그의 아내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토르가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네. 자네가 우리에게 잠잘 곳을 내어주었으니, 당연히 우리가 그 값을 치러야지.]
말을 마친 토르는 밖으로 나가 마차에서 두 마리의 산양을 풀었다. 그리고는 손수 두 마리의 산양을 잡아 그 가죽을 벗겨냈다. 그동안 농부는 로키의 명령에 따라 마당의 한가운데에 나무장작을 쌓았고, 로키가 나무 장작에 불을 붙였다. 토르는 마차의 옆에 산양의 가죽을 펼쳐놓은 뒤, 고기를 가져와 굽기 시작했다. 잘 익은 양고기의 냄새가 마당 한가득 풍겼고, 두 신과 농부의 가족들 모두 입맛을 다셨다. 토르와 로키가 고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농부의 가족들은 멀찍하니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토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농부의 가족들이 황송해하며, 토르의 근처로 다가와 앉았다. 토르의 눈에 농부의 곁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는 농부의 아들이 들어왔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보였는데, 큰 눈에 마르고 탄탄한 몸을 하고 있었다. 토르는 농부의 아들을 불러 자신의 곁에 앉혔다.
[녀석, 똘똘하게 생겼구나. 넌 이름이 뭐라고 하니?]
[네, 저는 '티알피(þjalfi : 올가미가 되는 자, 둘러싸는 자 또는 정복자)'라고 합니다.]
- 농부의 두 아이, 티알피와 로스크바 남매
티알피가 토르를 경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토르는 티알피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불 위에서 잘익은 넓적다리를 하나 떼어내 티알피에게 쥐어주었다. 티알피가 고기를 받아들고는 농부를 쳐다보았다. 농부와 그의 아내가 황급히 손짓을 보냈다. 자신들의 아들이 신이 내어주는 음식을 받고, 또 머리까지 쓰다듬을 받았으니, 이들로서는 더없이 커다란 영광이었다. 그제서야 티알피는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토르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편하게 먹거라, 티알피. 나에게도 너처럼 귀여운 아들내미가 있으면 좋을텐데. ]
티알피가 먹는 모습을 보던 토르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농부와 그 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고기를 먹고나면, 반드시 뼈는 그대로 저 가죽 위로 옮겨 놓거라. 알았지? 반드시 그대로 저 가죽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티알피와 농부의 가족에게 주의를 준 뒤, 토르도 다리를 하나 들어 맛있게 먹었다. 농부의 마당에서 흥겨운 양고기 만찬이 펼쳐졌다. 토르와 로키는 신나게 웃고 떠들며 고기를 먹었고, 농부의 가족들도 모처럼 먹는 고기의 맛에 행복했다. 그러던 중, 티알피는 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 칼을 꺼내 넓적다리 뼈를 갈라 그 안에 있는 골수를 빨아먹었다. 오래 전, 티알피는 골수의 독특한 맛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서야 만찬이 끝났다. 토르와 로키는 농부가 마련한 잠자리로 향했고, 티알피는 여동생과 함께 먹고남은 뼛조각들을 모아 산양의 가죽 위에 차곡차곡 올려두었다. 농부의 오두막은 생각보다 포근했고, 토르와 로키는 편안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