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의 예상대로, 점심무렵에 배는 항구에 들어섰다. 스노리는 일찌감치 갑판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항구의 풍경은 여전했다. 많은 배들이 오가고 있고, 항구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 뒤로 왕궁이 보였다. 이 항구는 왕국의 현관과 같은 곳이다. 바다 건너의 여러 지역과 나라와 교역도 이 항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겨울에도 춥지 않았고, 비가 많이 내리지만 눈은 왕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적었다. 그렇기에 이 항구는 왕국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왕궁이 옮겨오면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전 스노리가 이곳에 올 때는 많은 부하들과 일족의 젊은이들을 대동했다. 왕궁의 저명인사들이선착장까지스노리를 마중 나왔다. 그때의 스노리는 마치 '섬의 주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스노리의 곁에는 조카인 스튤라 뿐이다. 배가 선착장에 닻을 내렸고, 스노리는 스튤라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스노리의 눈에 마중을 나온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카이자 스튤라의 형인 '올라프'와 또 다른 조카인 '토르두르 시그바트손(Þorður kakali Sighvatsson)'이었다. 두사람의 뒤로 그들의 종자(從者 : 기사의 무기를 들고 따르는 시종) 몇 명이 마중을 나온 전부였다. 그들 이외에 왕궁과 관련된 인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스노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카들에게로 향했다. 올라프가 스노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올라프 : 숙부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해 죄송합니다.
스노리는 올라프의 어깨를 토닥였다. 올라프는 스튤라 보다 앞서 스노리의 제자가 되어 많은 것을 배웠다. 이후, 올라프는 왕궁에서 젊은 스트룰룽 일족을 돌보고 관리하는 일과 함께 스노리에게 왕궁의 일들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왕궁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를 감지한 올라프는 서둘러 자신의 시종을 스노리에게 보냈다. 그러나 올라프가 보낸 시종이 도착한 것은 스노리가 시그바투르에게 구금된 다음날이었다. 올라프도, 그의 시종도 최선을 다했으나, 왕궁과 스노리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스노리는 올라프를 탓하지 않았다. 그동안 올라프의 노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 토르두르가 스노리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토르두르 : 수.. 숙부님! 죄.. 죄송합니다! 흐흑!
토르두르의 눈에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토르두르는 스노리를 내쫓은 시그바투르의 아들이자, 스튤라 시그바트손의 동생이다. 그러나 토르두르는 아버지나 형과는 노선이 달랐다. 토르두르는 시그바투르의 사람들 중에서 거의 유일한 스노리 편이다. 토르두르는 자신의 형 스튤라 시그바트손, 올라프와 함께 스노리의 밑에서 지내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동안 토르두르는 형과 달리 스노리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토르두르는 스노리와 협력하기를 바랐으나, 시그바투르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했다. 결국 토르두르를 왕궁으로 교육을 보낸다는 구실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토르두르는 자신의 아버지가 스노리를 추방시켰다는 사실이 슬프고 괴로웠다. 도무지 스노리를 볼 면목이 없었지만, 올라프의 설득에 함께 스노리를 마중나왔다. 스노리는 잠깐 멈칫했으나 가만히 토르두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후, 스튤라가 토르두르를 부축해 일으켰다. 여전히 토르두르는 울고 있었다. 올라프가 스노리에게 말했다.
올라프 : 숙부님, 저택으로 가시지요.
스노리 : 아니다. 난 왕궁으로 갈 것이다.
스노리가 왕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스노리의 대답에 토르두르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토르두르의 별명인 '카칼리(kakali)'는 '말더듬이'라는 뜻이었다. 올라프가 어두운 표정으로 스노리에게 말했다.
올라프 : .. 왕궁에서는 숙부님의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왕궁은 더이상 예전의 왕궁이 아닙니다. 지금 왕궁으로 가시는 것은 맨몸으로 '우트가르드'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노리의 표정이 올라프보다도 더욱 어두워졌다. 출입을 금지당하다니!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다는 말인가.왕궁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첫걸음부터 길이 막혔다. 결국 스노리는 참지 못하고, 발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 토르, 우트가르드에 입성하다.
스크리미르와 헤어진 토르와 일행들은 우트가르드 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늘도 없는 넓은 들판을 오전 내내 걸었는데, 그동안 토르의 침울한 마음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검고, 회색빛의 우트가르드의 성벽이 점점 가까워지자, 우트가르드의 성벽은 더욱 토르와 일행을 위압했다. 솔의 마차가 머리 위에 걸릴 즈음(정오), 토르와 일행은 드디어 우트가르드 성벽에 도착했다. 우트가르드의 성벽은 아스가르드의 그것보다도 높고 웅장하게 보였다. 성벽의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로키나 인간 남매는 물론, 토르마저도 목이 뒤로 꺾일 정도까지 젖혔으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아~ 크기도 하구먼~ 이거 아스가르드 성벽보다도 높겠는걸?]
로키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치발을 하며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티알피와 로스크바도 로키를 따라 하며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토르는 스크리미르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기가죽기보다는 호승심이 더 크게 일어났다.
[이런 성벽 따위는 나에겐 모래성에 지나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토르의 말에 로키가 키득거렸다. 토르는 빨리 우트가르드의 성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히 들어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토르와 일행은 멀리서 보았던 성문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우트가르드의 성벽은 크기만큼 길어서 성문까지 가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철로 만들어진 듯한 우트가르드의 거대한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토르가 성문을 만져보았다.
[이게 문이군..]
[이건 완전히 철덩어리아니야? 두께가 땅만큼이나 두껍겠는데?]
로키가 성문을 두드려보며 말했다. 성문을 만지작거리던 토르가 갑자기 두 주먹을 맞대더니 우두둑 소리를 내며 꺾었다. 아무래도 토르는 힘으로 성문을 부숴버릴 심산인 것 같았다. 로키가 그런 토르의 앞을 막아섰다.
[로키, 이리 나와. 이까짓 문 따위 내가 한방에 날려주지.]
[아니, 아니, 잠깐만. 지금 몸이 달아있는 건 알겠지만.. 그래서 이 성문을 때려 부수겠다고? 에이~ 여기서부터 힘을 쓰면 쓰나~ 이런 파괴행위는 어린애들 정서교육상 좋지 않지이~ 이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로키가 혀를 차며 말했다. 토르가 티알피와 로스크바를 흘낏 보더니 로키에게 물었다.
[그럼 어쩌자고?]
로키가 검지 손가락을 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러니 자네가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찼다고 놀림을 당하는 거야. 머리도 좋은 친구가 툭하면 주먹이 앞서니 말이야. 이럴 때는 머리를 써야지잉~ 머리 하면 나 로키님이 아니겠어?]
대답을 마친 로키는 가만히 성문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러다 한 곳에 가만히 멈춰 서서는 무언가를 살펴보더니 '피식!' 하며 웃음을 지었다. 로키가 살펴본 곳은 성문과 성벽을 연결하는 경첩을 붙여놓은 곳으로 경첩만큼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우트가르드의 성벽 전체를 보면 작은 틈이었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지나갈 만한 크기였다. 로키는 토르와 인간 남매를 손짓으로 불렀다. 경첩의 틈을 본 토르는 버럭 화를 냈다.
[여기로 들어가자고? 로키!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천둥신 토르라고! 나보고 이런 개구멍으로 들어가라는 거야?!]
[이봐, 그럼 이 문을 정말 부숴버릴꺼야? 얼마나 많은 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리오너라~ 천둥신 토르가 왔으니 문을 열거라~~' 하면서 광고라도 할꺼냐고? 때로는 이렇게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야.]
말을 마친 로키는 앞장서서 성벽과 성문의 틈으로 들어갔다. 로키는 마치 물고기가 미끄러지듯 아주 수월하게 틈을 통과했다. 먼저 들어간 로키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자, 티알피와 로스크바도 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두 신에 비하면 훨씬 체구가 작은 인간 아이들인지라 티알피와 로스크바도 아주 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성문 밖에는 토르 혼자 남겨졌다. 앞서 들어간 일행이 지켜보고 있는 데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토르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토르가 그 틈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워낙 체격이 크고 우람한 토르에게는 이 틈은 너무도 비좁았다. 결국 토르는 힘으로 철문의 일부를 우그러뜨리면서 겨우 틈을 빠져나갔다. 투덜대는 토르의 눈에 우트가르드의 성 내부가 들어왔다.
-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the Wall'. 토르와 일행이 마주한 우트가르드의 성벽도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출처 : https://winteriscoming.net/ )
우트가르드의 성 안은 매우 크고 넓었다. 이정도의 크기라면 아스가르드를 이곳에 집어넣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주변에 보이는 집들은 성벽보다는 낮았는데 그럼에도 크기가 매우 커서 어지간한 산보다 컸다. 집 사이로 마치 광장처럼 보이는 아주 넓은 들판이 보였다. 그것은 길인 것 같았고, 길 끝에 아주 거대한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높은 신분의 거인이 사는 저택으로 보였는데, 분명 그 저택이 이 우트가르드의 성에 중심일 것이다. 토르는 다시금 호승심이 크게 일었다. 토르는 가슴을 넓게 펴고, 길을 따라 거대한 저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놀란 로키가 낮은 목소리로 그런 토르를 말렸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일단 상황을 좀 보자고!!]
그러나 토르는 로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길 한복판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로키는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 놈의 승질머리 하고는! 에라~ 나도 모르것다~! 티알피, 로스크바, 아무래도 오늘이 우리 제삿날인가 보다. 가자!]
로키는 황급히 토르를 뒤쫓았다. 놀란 티알피와 로스크바도 서둘러 로키의 뒤에 바짝 붙었다. 아직 하늘에는 솔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고, 방패의 햇살이 토르와 일행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