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리가 스트를룽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의 현관으로 일족의 젊은이들이 스노리를 마중 나왔다. 사실 스노리는 이들의 마중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왕궁과 섭정은 그렇다 쳐도, 귀족들 중에서 그 누구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상황에서 이들의 마중이 뭐가 대수이겠는가. 스노리는 가볍게 목례로 답하며, 아무 말없이 저택으로 들어갔다. 올라프는 스노리를 저택에 있는 스노리의 방으로 안내했다.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응접실을 겸한 집무실과 침실로 나뉘어 있었다. 큰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며 방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평소에는 비어 있는 날이 많았지만, 올라프는 정기적으로 이 방을 관리했다. 스노리가 왕궁을 방문할 때면, 늘 그의 숙소이자 집무실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올라프는 이번에도 미리 정리를 마쳤고, 스노리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했다.
올라프 : 숙부님, 우선은 여독을 푸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와 토르두르가 옆방에 있으니, 불편하신 것은 언제든 저희를 불러주세요.
스노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프가 스노리에게 인사를 한 뒤, 토르두르와 함께 스튤라를 데리고 나갔다.
토르두르 : 스튤라, 너.. 너는 이쪽이야.
올라프는 토르두르와 함께 스튤라를 자신들의 옆 방으로 데려갔다. 방은 작았지만, 스튤라가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작은 창으로햇살이 들어왔고, 그 맞은편에는 잘 마르고 푹신한 짚을 넣은 침대가 있다. 창문 옆으로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스튤라가 형들에게 물었다.
스튤라 : 아저씨는.. 괜찮으시겠죠?
올라프 : 응.
토르두르 : 다.. 당연하지!
스튤라의 걱정과 달리 스노리는 곧바로 다음 행보에 들어갔다. 스노리는 한동안 창가에 서있는가 싶더니 이내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에는 올라프가 미리 준비해 둔 필기구와 충분한 양의 양피지가 준비되어 있었다.(남부 이슬람에서 구할 수 있는 종이는 양피지보다도 비쌌다.) 스노리는 차분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왕과 섭정 앞으로 보낼 편지를 썼다. 평소와 다르게 스노리는고치고 다시 쓰는 것을 반복했다. 스노리는 글자에 자신의 진심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중간에 올라프가 간단한 식사를 가져온 것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스노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서야 스노리는 왕과 섭정에게 보낼 편지에 봉인을 찍어 책상 한쪽에 나란히 두었다. 그런 뒤 스노리는 두 눈을 감고, 잠시 의자에 기대 쉬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스노리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귀족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스노리는 올라프와 토르두르를 불렀다. 스노리는 먼저 올라프에게 왕과 섭정 앞으로 쓴 편지를 주어 왕궁으로 보냈다. 다음으로 토르두르에게 귀족들 앞으로 쓴 편지를 주어 귀족들에게 보냈다. 올라프와 토르두르는 서둘러 말에 올라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스튤라는 두 형들을 배웅한 뒤, 늦은 아침 식사를 접시에 담아 스노리에게로 향했다. 비록 왕궁의 출입은 금지당했으나스노리는 멈추지 않았다. 스노리는 자신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그날을 위해서.
#. 새로운 식구들
'빌스키르니르(Bilskirnir : 빛나는 틈새, 또는 세례의 공터)'는 천둥신 '토르(Thor : 천둥, 굉음)'의 저택이다. 우트가르드 여행을 마친 토르의 무사귀환은 토르의 가족과 하인들은 물론 아스가르드의 기쁨이었다. 이에 더해 빌스키르니르에세 명의 새로운 식구들이 들어왔는데, 이들로 인해 저택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첫번째 새 식구는 토르가 미드가르드에서 시종으로 데리고 온 '티알피(þjalfi : 올가미가 되는 자, 둘러싸는 자 또는 정복자)'다. 토르는 이 재주 많은 소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고,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토르의 저택이 있는'스루드헤임(Þruðheimr : 힘의 평야)'에는 연일 티알피의 땀과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알피는 그 누구보다도 발이 빠르고 민첩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티알피는 '토르의 시종'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두번째 새 식구는 역시 토르가 미드가르드에서 시종으로 데리고 온 '로스크바(Roskva : 쾌활, 용감)'였다. 티알피의 여동생인 로스크바는 토르의 외동딸인 '스루드(Þruðr : 힘)'의 시녀가 되었다. 평소에 여동생을 바라던 스루드는 로스크바를 시녀이자, 여동생처럼 여기고 아꼈다. 로스크바는 이름처럼 쾌활하고, 명랑해서 스루드와 성격적으로도 잘 어울렸다. 로스크바도 스루드의 곁에서 충실하게 그녀를 모셨다.
세 번째 새 식구는 뜻밖에도 요툰헤임에서 온 여자 거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야른삭사(Jarnsaxa : 철로 만든 단검)'로 놀랍게도 토르의 아내인 '시프(Sif : 인척)'가 직접 데리고 온 토르의 '소실(小室)'이다. 이 사건은 아스가르드에 작은 술렁거림을 일으켰다. 토르와 시프는 아스가르드는 물론이고, 아홉 세상에 널리 알려진 '금슬 좋고, 다정한 부부'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야른삭사가 토르의 소실이 된 것은 사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오딘이나 로키처럼 토르도 종종 세상을 여행했다. 요툰헤임은 미드가르드와 더불어 토르의 단골여행지였다. 토르가 요툰헤임을 여행할 때면, 반드시 거인들 중 누군가는 니블헤임으로 주소지를 옮겨야 했다. 당연히 요툰헤임의 거인들은 토르에 대한 두려움만큼 적대감도 강했다. 시프는 언제나 이런 남편을 걱정했다. 토르는 아홉 세상 최고의 전사지만, 영원불멸의 존재는 아니다. 시아버지인 오딘이나 로키는 여행을 할 때면 변장을 했다. 그러나 토르는 이것을 매우 싫어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선호했다.그나마 옆에 오딘이나 다른 신이 함께라면 다행이었지만, 토르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겼다. 이런 상황이니 시프는 언제나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토르는 자신의 여행담을 시프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는 시프를 안심시킬 수 없었다.
언제인가 요툰헤임을 여행하고 돌아온 토르가 시프에게 자신을 돌봐준 거인 부녀(父女)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인 부녀는 여행으로 지쳐있던 토르를 숨겨주었는데, 이는 목숨을 건 호의였다. 이후에도 몇 번인가 토르는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모든 거인이 신과 토르를 적대한 것은 아니었고, 이는 토르도 마찬가지였다. 터르도 신에게 우호적이고, 인간을 괴롭히지 않는 착한 거인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시프는 거인 부녀가 고마웠고, 이따금 몰래 하인을 보내 거인부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인 부녀에게 보냈던 하인이 한 가지 소식을 가져왔다. 아버지 거인은 병이 들어 죽었고, 그의 딸이 혼자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바로 야른삭사였다. 그녀는 매력적인 처녀로 성장했지만, 아버지도, 가족도 없으니 좋은 혼처를 골라 시집을 가기는 힘들 것이다. 시프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시프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토르와 부부로 지낸 지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둘 사이에는 외동딸인 스루드 뿐이었다. 토르와 시프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갔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더 이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토르는 '아이는 울르와 스루드로 충분하다'라고 말했지만, 시프는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늘 마음이 아팠다.
'울르(Ullr : 영광이란 의미일 것으로 여겨짐)'는 시프가 토르와 결혼을 하며 데리고 온 아들이다. 시프의 아들이지만, 토르의 피는 이어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토르는 울르를 차별하지 않았다. 토르는 울르를 자신의 아들로 대우했고, 사랑으로 키웠다. 울르도 어릴 때는 토르를 잘 따랐는데,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토르에게 거리를두기 시작했다. 토르는 내심 섭섭했지만, '저 나이 때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지' 하며 울르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 모습을 보는 시프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토르는 시프를 매우 사랑해서애인이나 소실을 두지 않았다. 토르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시프는 알고 있었다. 다른 신들의 아이들이 태어날때면, 토르가 자신도모르게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그러나 사실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자와 나눈다는 것은 시프로서는 너무도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시프는 비슷한 일을 먼저 겪었던 시어머니 프리그를 보며 많은 고민을 했다. 시아버지 오딘은 수많은 애인을 두고, 그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프리그는 오딘의 애인들에 대해 관대했고, 오딘이 밖에서 낳은 아이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품었다. 과연 시프, 자신은 프리그처럼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랜 고민 끝에 시프가 내린 답은 '그럴 수 없다'였다.
- 토르의 소실, 야른삭사 (Ai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시험 삼아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야른삭사의 사정을 알게 된 시프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오랜 고민 끝에 시프는 야른삭사를 토르의 소실로 아스가르드에 데려왔다. 이 사건으로 가장 놀란 것은 토르였다. 토르는 야른삭사를 소실로 들이라는 시프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나 시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시프는 자신의 진심을 눈물과 함께 토르에게 털어놓았다. 결국 토르는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야른삭사는 빌스키르니르의 별채에 살며, 토르의 소실이 되었다. 이때가 토르가 우트가르드에서 돌아온 즈음이었다.
야른삭사는 토르의 소실이 된 지 오래지 않아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시프는 한편으로는 아프고, 슬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프는 때로는 언니처럼, 때로는 친정엄마처럼 야른삭사를 돌봐주었다. 야른삭사도 그런 시프를 잘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야른삭사를 소실로 들이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시프를 향한 토르의 사랑은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시프는 점차 마음을 놓게 되었고, 야른삭사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지내는 것도 익숙해졌다. 이때가 토르가 우트가르드에서 돌아온 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