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침실 창문사이로 살포시 들어왔다. 아름다운 시프는 토르의 팔을 팔베개로 삼아, 새근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시프의 숨소리에 맞춰 그녀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이 토르의 볼과 가슴을 하늘거리며 스쳤다.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부드러웠지만, 토르는 오늘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르는 잠을 청하기는커녕, 애꿎은 천장만 뚫어져라 노려볼 따름이었다. 토르는 우트가르드에서 당한 수모를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우트가르드에서의 일이 불쑥 솟아오를 때면, 그 좋아하는 '미드(벌꿀술)'조차도 맛이 없었다. 역시 우트가르드에서 당한 수모를 만회하지 않고서는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만회를 해야 기분이 풀릴 것인가?
토르는 살포시 시프의 머리를 들어 팔을 빼낸 다음, 조용히 저택 밖으로 걸어 나왔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토르는 스루드헤임을 걸으며 밤바람을 쏘였다. 그럼에도 느는 것은 한숨이요, 가슴속은 답답하기만 했다.
[(아하.. 어쩐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우트가르드 로키 녀석!!]
우트가르드의 일이 떠오르며, 토르는 강하게 우트가르드 로키의 이름을 내뱉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토르는 우트가르드 로키의 말과 행동을 납득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토르에게서 자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일 테니까. 그렇다고 토르가 그런 수모를 그저 참아 넘길 수는 없다. 그것은 토르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토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조무래기 거인들을 두들긴다면, 그것은 화풀이로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만큼 속 좁은 놈이 될 뿐이다. 토르의 분노는 그 정도로 풀리지도 않을 것이다. 토르가 다시 우트가르드를 찾아가 복수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토르에 맞설 테니까.
긴 고민 끝에 토르가 떠올린 것은 그에 버금갈 만한 일을 벌여서 거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거인들도 두려워하는 존재를 토르가 혼내준다면, 토르의 분노도 조금을 풀릴 것이다. 그런데 대체 누구를 혼내줘야 거인들에게 제대로 약발이 먹힐 것인가.. 고민을 하는 동안 스루드헤임의 들판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토르가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르면서 지평선이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듯 밝아왔다. 순간 토르는 아주 딱 맞는 대상이 떠올랐다.
[아! 그거다!!]
뱀! 바로 그것이었다. 토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저택으로 뛰어들어갔다. 자신의 무기고로 들어간 토르는 아주 오래전 여행을 하며 걸쳤던 옷을 꺼내어 입었다. 그 옷은 너무도 낡아서 토르가 지닌 옷 중에서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옷이었다. 토르는 몇 가지 간단한 여행 물품으로 작은 봇짐을 쌌는데, 당연히 그 안에는 '묠니르(Mjollnir : 가루로 만드는 것)'와'강철장갑(Jarngreipr)'을 숨겼다. 준비를 끝낸 토르는 침실로 돌아가 여전히 새근거리며 잠이 든 시프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또 이렇게 여행을 가서. 며칠만 더 참아줘. 금방 다녀올 테니까.)]
토르는 가만히 잠든 시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몰래 저택을 나온 토르가 아스가르드 성문으로 다가갔다. 토르를 발견한 헤임달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 토르 형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그리고 그 꼴은 대체 뭐구요? 설마 또 어디를 가시려구요?]
[요툰헤임.]
토르는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헤임달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또 거인 사냥을 떠나시는 겁니까? 더군다나 이제 막 둘째 형수님이 아이를 가진 상황인데요.]
[이번은 사냥이 아니야. 그냥 조용하게~ 낚시를 하러 가는 거지. 아무도 나라는 걸 모르게 말이야. 뭐.. 그러다가 낚시가 영 시원찮으면 그 동네 망나니들 교육도 좀 시킬지도 모르지만.]
토르의 대답을 들은 헤임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차피 같은 거잖아요..]
토르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던 헤임달은 부관을 불러 아스가르드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발걸음을 떼려던 토르가 헤임달을 돌아보며 말했다.
[헤임달~ 너 요즘 은근 잔소리가 많아진 느낌이야?]
[하하, 그런가요? 뭐, 로키란 녀석과 많이 붙어 다닌 탓이겠지요. 참, 이미 잔소리를 하는 김에 형님께 한 마디만 더 할께요.]
헤임달이 잔소리를 이어가려고 하자, 토르가 장난스레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토르도 그동안 로키와 너무 많이 붙어 다닌 모양이었다. 헤임달이 토르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후후.. 그런데 지금 그대로 요툰헤임에 가신다면, 세 살짜리 거인도 형님이 토르라는 걸 알 겁니다. 조용히 낚시를 하러 가신다면서요?]
[!!]
헤임달의 말에 토르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지나갔다. 아무래도 낡은 옷만으로는 정체를 숨기기 힘든 모양이라고 토르는 생각했다.
- 토르의 변장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출처 : https://www.history.com/shows/vikings/pictures )
비프로스트를 건너 요툰헤임으로 향하던 토르는 숲 속의 작은 개울가에 도착했다. 개울의 물은 아주 맑았고, 마치 거울처럼 토르의 얼굴도 잘 비추어주었다. 토르는 봇짐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고 물가의 진흙도 조금 떼어내 얼굴 여기저기에 대고 문질렀다.
[뭘 해도.. 어색하네? 그럼 수염을 이렇게 해보고.. 여기는 이렇게.. 하아.. 변장하는 법을 배워둘걸.]
토르는 개울물에 얼굴을 비춰가며 변장에 열중했다. 그러나 원체 변장과는 거리가 먼 토르인지라 뭘 해도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변장을 했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토르는 슬슬 짜증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수염은 대강 가려졌고, 이 정도면 그 누가 날 토르로 보겠어.]
결국 토르는 변장을 대충 마무리하고는 두 팔을 털며 일어섰다. 토르는 다시 정해둔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