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리에게 왕궁에 다녀온 일을 전하는 올라프는 축 늘어진 어깨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웠다. 올라프가 왕궁에 스노리의 편지를 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올라프는 우선 공식적인 방법으로 왕과 섭정에게 스노리의 편지를 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왕궁에 들어서며 올라프는 자신을 보는 왕궁의 분위기가 전보다도 더 냉랭한 것을 느꼈다. 왕궁에도 스노리의 도착이 알려졌고, 왕궁의 모두가 출입을 금지당한 스노리가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방법으로는 스노리의 편지가 왕에게 전해지는 것은 힘들 것이다.
이에 올라프는 아쉽지만,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하기로 했다. 올라프는 왕을 모시는 시종들 중에서 평소에 자신과 깊은 친분이 있던 시종을 몰래 불러냈다. 올라프는 간신히 시종을 설득했고, 그에게 스노리의 편지를 왕에게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 마침내 올라프에 설득에 응한 시종이 스노리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갔다. 올라프는 왕궁의 뜰에서 마음을 졸이며 시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올라프 앞에 나타난 것은 얼굴이 시뻘겋게 된 시종과 화가 잔뜩 난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은 올라프가 시종을 몰래 불러낸 것을 알아챘고, 시종을 추궁하여 스노리의 편지를 왕에게 전하려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의 시종장 : 올라프! 대체 너는 왕궁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너희 가문은 이런 협잡질 밖에는 모르는가? 스노리와 너의 그동안의 노고를 생각해 이번 일은 눈감아주마. 허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마라!
왕의 시종장은 스노리의 편지를 올라프의 발 앞으로 집어던졌다. 올라프는 황급히 스노리의 편지를 다시 집어넣었다. 다른 비공식적인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 방법도 쓸모는 없을 것이다. 올라프는 서둘러 왕궁의 뜰을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섭정에게는 스노리의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처음 올라프는 섭정에게도 공식적인 방법으로 스노리의 편지를 전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스노리의 편지를 왕에게도, 섭정에게도 전하지 못한 올라프는 크게 상심했다. 그렇게 올라프가 왕궁을 나오려는 그때, 섭정의 시종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올라프는 그와도 친분이 있었고, 그를 통해서 섭정에게 보내는 스노리의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올라프는 뒷일은 섭정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만, 그래도 섭정에게는 스노리의 편지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스노리에게 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스노리는 담담하게 올라프의 보고를 들었다. 올라프가 보고를 하는 사이, 귀족들에게 갔던 토르두르도 돌아와 스노리의 방으로 올라왔다. 스노리는 내심 기대했지만, 토르두르도 올라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 중 일부는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고, 일부는 만나는 주었으나 스노리의 편지는 거부했다. 다행히 나머지 귀족들은 스노리의 편지를 받아주었다. 두 조카의 보고를 들은 스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노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며칠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누군가가 밤의 어둠을 뚫고, 스트를룽 저택의 현관을 두드렸다. 그는 섭정이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올라프에게 섭정의 편지를 전하더니 이내 다시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올라프는 서둘러 섭정의 편지를 스노리에게 전했다. 스노리는 마침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스노리는 천천히 섭정의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스노리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올라프 : 숙부님..
스노리 : 내일 다녀올 곳이 있다. 말을 준비해 두거라. 아, 스튤라를 데려갈 것이다. 그 아이에게도 말해두거라.
스노리는 섭정의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 거인 흐룽그니르
화창한 햇살이 살포시 바람에 얹혀 흐르는 어느 날이었다. 거인 '흐룽그니르(Hrungnir : 싸움꾼, 소란 또는 둥그런 것)'는 자신의 애마에 올라 한가롭게 산책 중이다. 그는 요툰헤임에서 이름난 전사이며, 이 지역을 지배하는 자였다. 아직 한낮은 아니었지만 햇살이 따가웠다. 말을 달려 몸이 더워진 흐룽그니르는 시원한 바닷바람이라도 쏘일 요량으로 바닷가 언덕으로 말을 몰았다. 흐룽그니르는 절벽 위 커다란 전나무 아래에 말을 멈췄다. 예상대로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흐룽그니르와 그의 애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흐룽그니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넓게 펼쳐진 바다를 둘러보았다. 햇살이 수면에 부딪히며 반짝였다. 커다랗고 푸른 사파이어 위에서 가늘고 부드러운 금가루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흐룽그니르가 바람을 쏘이며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저 멀리 바다 위로 한줄기 은빛인지, 회색빛인지 모를 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구름이라기에는 다가오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흐룽그니르는 자세히 보고 싶어 응그렸다. 가만히 살펴보니 은빛으로 빛나는 옅은 구름 사이로 황금색 투구 같은 것이 반짝였다. 그 아래로 은빛으로 반짝이는 말발굽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늘을 날아 바다를 건너 달리는 말이라니! 자신의 애마 말고도 저렇게 달릴 수 있는 말이 또 있다는 말인가?!
흐룽그니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그 은빛 구름은 빠르게 언덕 아래 해변 쪽으로 사라졌다. 흐룽그니르는 구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흐룽그니르는 말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 절벽 아래 해안으로 이어지는 숲으로 말을 몰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흐룽그니르는 곧 구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한 낯선 사내가 말을 타고, 숲 속을 천천히 거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흐룽그니르는 말을 멈추고 사내를 살펴보았다. 그는 챙이 긴 모자와 긴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온통 회색빛이었다. 심지어 은색으로 빛나는 수염까지 회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는 노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풍채로 보아 결코 보통 인물은 아닐 것 같았다.
흐룽그니르의 시선은 사내를 거쳐 사내가 타고 있는 말에게로 이어졌다. 사내가 탄 말의 몸은 잿빛이었고, 매우 크고 건강했다. 말발굽과 갈기는 은빛으로 빛났는데, 발이 무려 8개나 되었다. 흐룽그니르는 한눈에 세상에서 한 손에 꼽힐 명마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애마보다는 모자라겠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을 명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주인도, 말도.. 흐룽그니르는 지금껏 이런 대단한 조합을 본 적이 없다. 흐룽그니르는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과 함께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흐룽그니르는 낯선 사내를 향해 외쳤다.
[거기, 노인장은 멈추시게!]
그러나 흐룽그니르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사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흐룽그니르는 다시 사내에게 외쳤다.
[노인장! 잠깐 멈추란 말이오!]
사내는 흘낏 흐룽그니르를 보았을 뿐,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았다. 흐룽그니르가 천천히 말을 몰아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왠지 사내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몸이 달은 흐룽그니르가 말고삐를 흔들자, 그의 애마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려 달려 나갔다. 사내는 자신의 곁으로 노란빛의 바람이 스치는 것을 느끼고는 미소를 지었다. 흐룽그니르를 제외한 우리가 짐작한 대로.. 이 낯선 사내는 '오딘(Odinn : 분노)'이었다. 오딘보다 몇 걸음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운 흐룽그니르가 오딘을 보며 말했다.
[이보시오!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이곳은 나, 흐룽그니르의 숲이라오. 당신은 내 땅을 거닐고 있으니, 내 말을 따라야 하오!]
오딘은 가만히 자신의 애마,'슬레이프니르(Sleipnir:미끄러지듯 달리는 것)'를 세웠다. 늘 그렇듯.. 이건 오딘이 계획한 대로였고, 슬레이프니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흐룽그니르가 오딘에게 물었다.
[이제야 말을 세우는구려. 노인장은 누구이고 여기서 뭘 하고 있소?]
[산책을 하는 중이지.]
오딘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흐룽그니르는 사내가 이곳을 잘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산책? 이보시오, 노인장. 여기는 내 숲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소? 여기는 내 숲이란 말이오!]
[난 그런 걸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오딘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흐룽그니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허락? 내가 이 땅의 주인인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인가?!]
흐룽그니르는 오딘을 째려보았다. 흐룽그니르는 자신은 사내를 대우해 주었음에도, 그가 거만하게 나오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나 일단은 사내도, 사내가 탄 말이 궁금했기에 참았다.
[좋소. 노인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신이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소. 바다 위를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구름 같더군. 노인장이 탄 그 말은 꽤 좋은 말이 분명하오.]
[좋은 녀석이지. 이런 궁벽한 거인의 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녀석이거든.]
오딘의 대답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흐룽그니르가 기가차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 그건 노인장이 몰라서 하는 말이오! 노인장의 말이 좋은 녀석인 건 나도 알겠지만, 그래도 내 애마에는 미치지 못하지. 이 녀석은 대대로 이곳 요툰의 땅에서 살아온 명마의 자손이지. 요툰은 물론이고, 아홉 세상 최고의 명마라오. 이 녀석의 이름은 '굴팍시(Gullfaxi : 황금의 갈기)'라고 하지!]
흐룽그니르가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 황금갈기, 굴팍시
[다리가 8개나 있으면 뭐 하오? 그 짧은 몸뚱이에 다리만 8개니 어디 제대로 달리기나 하겠소? 하하! 당신의 말보다는 나의 애마, 굴팍시의 다리가 훨씬 길지! 하하!]
흐룽그니르가 웃음으로 말을 마쳤다. 그러자 오딘이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한 손을 튕겼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 말에 미친놈이 하나 있다던데, 그게 너였군. 비실거리는 망아지 새끼 하나 타고 다니면서 잘난 척한다던.]
[뭬야?! 노친네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라고?! 말에 미친놈? 비실거리는 망아지?! 이 노친네가 아주 단단히 미쳤군! 난 요툰헤임의 위대한 전사 흐룽그니르다! 아홉 세상 모두가 내 이름 앞에 벌벌 떨지! 나의 애마, 굴팍시는 아홉 세상에서 가장 빠른 말이야! 아무리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고 해도 굴팍시의 황금빛에는 미치지 못하지! 그런데 뭐가 어째?!]
오딘의 비아냥거림에, 흐룽그니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락부락한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흠, 퍽이나? 자네는 말을 잘 모르는군. 이보시게, 애송이. 명마라는 건 내 말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라네.]
오딘이 슬레이프니르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슬레이프니르가 마치 '그렇다'라고 대답이라도 하는 듯 푸레질을 쳤다. 오딘은 물론 슬레이프니르도 흐룽그니르와 굴팍시를 대놓고 비웃었다.
[흥! 지 주인 닮아서 타고 남은 재같이 생긴 말이 뭐라고! 이런 병신 같은 말이 뭐가 대단하다는 건가? 이봐, 노친네. 그만 좀 웃기라고.]
흐룽그니르가 여전히 화를 풀지 않고 대꾸했다.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네지. 내 말은 바람보다도 빠르지. 어떤 명마보다도 빠르고 도약력도 좋아. 이제껏 그 어떤 말과 달려서 진적이 없다네. 자네의 그 뭐냐.. 황금을 갈기는지, 똥을 갈기는지 뭐라는 그 녀석이 내 말과 달린다면, 그 길다는 다리는 모조리 부러지고 말 꺼야. 바닥에 나뒹굴면서, 내 말의 엉덩이만 쳐다보겠지. 그렇지?]
-흐룽그니르와 오딘
이번에도 오딘의 말이 맞다는 듯, 슬레이프니르가 푸레질로 대답했다. 슬레이프니르는 오딘보다도 한 술 더 떠, 눈을 내리깔며 굴팍시를 내려보았다. 흐룽그니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고, 이는 굴팍시도 마찬가지였다. 굴팍시도 슬레이프니르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발을 굴렀고, 황금빛의 갈기는 더욱 환하게 빛났다. 흐룽그니르가 큰소리로 오딘에게 말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좋아! 그럼 한번 달려보자구! 자, 할꺼야 말꺼야?!]
[흠..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애원하니.. 그럼, 한 번 달려주지.]
오딘은 흔쾌히 흐룽그니르의 제안에 응했다. 흐룽그니르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오딘을 노려보았다. 오딘은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굴팍시도 화가 났는지, 연실 콧김을 내뿜었다. 슬레이프니르는 그런 굴팍시를 시큰둥하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