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딘과 흐룽그니르는 달리기 시합을 하기 위해 말을 몰아 일단 숲을 빠져나왔다. 숲을 나오는 동안 오딘과 흐룽그니르는 단 한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다. 슬레이프니르와 굴팍시도 서로 시선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숲을 빠져나와 넓은 들판이 나오자 오딘과 흐룽그니르는 나란히 섰다. 흐룽그니르가 오딘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봐, 노친네! 먼저 지치는 녀석이 지는 거요?!]
[그렇게 하지.]
오딘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흐룽그니르는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자, 그럼 출...]
[아, 잠깐.]
오딘이 갑자기 흐룽그니르의 출발 외침을 막았다.
[뭐야?! 이제 와서 관둘생각이라면 죽을 줄 아쇼!]
[음~ 당연히 그건 아니고. 그래도 이왕 하는 거, 뭐라도 거는 게 좋잖아? 음.. 그렇지, 내가 지면 자네에게 내 목을 내놓겠네.]
오딘이 내기를 제안했다. 그러자 몸이 단 흐룽그니르가 대답했다.
[아~! 그딴 게 뭐라고!! 내가 지면 노친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걸로 합시다! 자, 어서 달려보자고!!]
[자, 그럼 계약은 완료되었네. 다시 신호를 하게나.]
오딘이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흐룽그니르는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룽그니르는 마치 황소처럼 거칠게 숨을 내뱉고는 외쳤다.
[크후우우!! 하나, 둘, 셋! 출발!!]
흐룽그니르가 신호와 동시에 굴팍시가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굴팍시의 긴 다리가 대지를 때리는 것과 동시에 슬레이프니르의 8개의 다리도 대지를 벗어났다. 굴팍시가 달리는 모습은 그 이름처럼 한줄기의 황금빛 덩어리가 날아가는 것 같았는데, 마치 누군가가 대지 위에 황금으로 긴 선을 그어놓은 것 같았다. 물론 슬레이프니르도 굴팍시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슬레이프니르가 달려가는 모습은 은빛 광채 같았고, 마치 누군가가 대지 위에 은으로 긴 선을 그어놓은 것 같았다. 굴팍시와 슬레이프니르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막상막하로 달렸다. 금빛과 은빛으로 빛나는 두 빛의 선은 이내 대지를 벗어나 하늘과 바다 위로 거침없이 이어졌다. 어찌나 빠른지 인간이나 거인은 물론이고, 신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굴팍시가 말머리 하나 정도 앞으로 나서자, 흐룽그니르가 크게 웃었다.
[하하~! 감히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이건 흐룽그니르의 오판이었다. 흐룽그니르와 굴팍시는 이미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달리고 있는 반면, 오딘과 슬레이프니르는 아직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흐룽그니르와 굴팍시는 자신들이 앞서가서 신이 났지만, 모든 것은 오딘의 계획대로였으니까. 오딘에게 흐룽그니르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딘은 곁에서 달리는 굴팍시의 숨소리와 몸의 움직임,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갈기를 보고 있었다.
[(역시, 좋은 말이야. 저런 멍청한 거인 놈이 타긴 아깝지. 이 녀석-슬레이프니르-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마구간을 장식하기에는 딱이란 말이야..)]
오딘은 굴팍시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일부러 거친 달리기 시합을 벌인 것이다. 오딘은 굴팍시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오딘은 시간이 날 때면, '흘리드스캴프(Hliðskalf : 출입구가 있는 객실)'에 앉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요즘 오딘은 따분하다 못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미드가르드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을 보아도 전혀 재미가 없었다. 미드가르드에서 전쟁은 일상이나 다름없었고, 인간들이야 늘 저렇게 지지고 볶는 것이 일상이다. 그것이 아스가르드나 아홉 세상을 혼란하게 한 적은 없었다. 아스가르드는 평화로웠고, 거인들도 아주 아주 얌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르가 그렇게 요툰헤임을 뒤집어 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딘은 내심 자극을 받은 거인들이 일을 벌이기를 기대했지만, 놀랍게도 이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아스가르드의 평화는 좋은 일이지만, 그것과 오딘의 따분함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오딘은 최근 보고 듣는 토르의 모험과 활약에 은근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오딘 자신은 업무에 치이고, 세상사에 지쳐버린 노인과 같은 모습으로 흘리드스캴프에 늘어지듯 앉아있는 것에 비해, 아들인 토르는 연일 요툰헤임을 뒤집어 놓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들의 아버지로서의 체면상, 그런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오딘도 아들처럼 즐겁고 신나는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 오딘이 그런 생각을 하며 흘리드스캴프에 앉아있는데, 요툰헤임의 들판 위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흐룽그니르가 굴팍시를 타고 달리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오딘의 눈에 흐룽그니르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굴팍시였다. 오딘은 굴팍시가 마음에 들었고, 아주 탐이 났다. 그러다가 오딘은 모처럼 재미난 놀이거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오딘은 흘리드스캴프에서 일어나 슬레이프니르에 올랐고, 곧장 요툰헤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계획대로 흐룽그니르의 앞에 나타나 이렇게 달리기 시합을 벌이는 중이었다.
[달려라! 굴팍시! 아하하!]
오딘에게 흐룽그니르의 신이 난 외침이 들렸다. 오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손으로 잡고 있던 고삐를 짧게 두 번 흔들었다. 그러자 슬레이프니르가 알았다는 듯, 짧은 울음소리를 내더니 8개의 다리에 슬슬 힘을 주기 시작했다. 슬레이프니르가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말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는 찰나에 뒤집어졌다. 슬레이프니르가 달리며 생긴 은빛의 선이 빠르게 앞서 나가더니 은빛을 넘어 하얗고 밝은 빛이 되어 굴팍시를 앞지르며 달려 나갔다.
[하하하!!!]
오딘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오딘과 슬레이프니르가 추월을 하는 것도 모자라 빠르게 앞서 나가자 흐룽그니르와 굴팍시는 크게 놀랐다. 몸과 마음이 단 흐룽그니르가 굴팍시의 배를 연실 걷어찼고, 굴팍시는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속도를 올렸다. 굴팍시의 호흡은 더욱 거칠어졌고, 황금빛 갈기도 더욱 밝게 빛났다. 그럼에도 오딘과 슬레이프니르를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오딘은 흐룽그니르와 굴팍시가 몸이 달아 정신을 못 차리고 뒤쫓아 오도록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달렸다. 지금 이곳이 대지인지, 바다인지, 하늘인지.. 흐룽그니르와 굴팍시는 이제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오딘과 슬레이프니르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뒷모습만 보였다.
- 오딘과 슬레이프니르, 존 바우어 그림(1911.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leipnir )
얼마나 달렸을까? 앞만 보고 전력으로 달려가던 굴팍시의 속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흐룽그니르가 고삐를 채고, 발을 찼지만 굴팍시는 다시 속도를 올리지 못했다. 그때 앞서가던 오딘과 슬레이프니르가 순간적으로 무언가 장애물 같은 것을 뛰어넘는 것이 보였다. 흐룽그니르가 보니 앞에 무언가 벽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흐룽그니르는 고삐를 당겼고, 굴팍시는 가까스로 그 장애물을 넘었다. 다행히 장애물은 넘었지만 흐룽그니르와 굴팍시는 이미 많이 놀라고, 많이 지쳐버렸다. 이제 더 이상은 무슨 짓을 해도 오딘과 슬레이프니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결국 흐룽그니르는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굴팍시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그제야 흐룽그니르는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처음 보는 넓은 들판이었다. 흐룽그니르는 굴팍시가 숨을 고를 수 있게 천천히 들판을 빙글빙글 돌았다. 넓은 들판 뒤로 커다란 높은 성벽이 보였다. 조금 전 가까스로 뛰어넘은 그 장애물은 그 성벽인 것 같았다. 그러나 흐룽그니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은 처음 보는 곳이었고, 달려온 시간을 생각해 보니 자신의 땅에서 아주 멀리 온 것이 분명했다. 긴 달리기 시합과 불안해진 마음으로 흐룽그니르는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흐룽그니르가 어리둥절해하는데, 오딘이 천천히 슬레이프니르를 몰아 다가왔다. 흐룽그니르가 호흡을 삼키며 오딘에게 물었다.
[하아.. 하아.. 대체 여긴 어디요?]
[여기? 내 땅이지. 뭐, 모든 곳이 다 나의 땅이지만.]
미소를 짓는 오딘에게 흐룽그니르가 놀라 물었다.
[.. 노.. 노인장.. 대체 당신은 누구요?]
[음.. 난 오딘이라네.]
오딘이 껄껄거리면서 웃었고, 오딘의 은빛 수염이 웃음소리에 맞춰 흔들거렸다. 슬레이프니르도 모처럼 땀이 날 정도로 달린 것이 기쁘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오딘이라는 이름을 들은 흐룽그니르는 너무도 놀라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는 굴팍시도 마찬가지라, 거친 숨을 고르며 겁을 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